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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한국신학목포분교 교수 |
1.‘작은 교회’에 나타난 선교 전략
웨슬리의 선교사상을 논하고자 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점은 웨슬리의 저작들 중에 선교학에서 정의한 개념의 ‘선교’ 에 대한 연구 영역이나 웨슬 리가 선교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웨슬리가 평생의 사역을 통해 성취해 내었던 선교적 업적과 수많은 저작들과 설교들 속에 숨어 있는 선교 사상의 포괄적인 틀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그의 선교 사상을 더욱 발굴해 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본 서의 중요한 관점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개신교의 선교 전통은 인간의 타락, 개인의 신앙고백을 통한 영혼구원, 즉 개인의 영혼구원을 선교의 최대목표라 할 때 웨슬리는 탁월한 선교사역자라 할 수 있다.
존 웨슬리가 1792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몇몇 학생들과 더불어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였을 때에는 이미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지역에만 사십여 개의 신도회가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신도회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 신도회들은 웨슬리의 ‘작은 교회’의 조직을 위한 선교 전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그의 세계선교의 비전이었던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는다”라는 선교사상의 큰 맥락에서 선교방법으로서의 ‘작은 교회’를 개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스패너(P. Spener)에서 진젠도르프(Zinzendorf)로 이어지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에 대한 개념과 그에 관한 운동은 모라비안 교도(Moravian Church)들의 선교활동을 통해 웨슬리에게 전해졌다. 1753년에 스팡겐베르그(Spangenberg)가 한 무리의 모라비안 교도들을 이끌고 미국의 조지아(Georgia)로 가기 위해 떠나는 배에 때마침 웨슬리도 함께 했다. 이것이 요한 웨슬리와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는데, 후에 웨슬리는 자신의 일기에서 말하기를 “그 때 그들로부터 받은 감동은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것이었다”고 했다.
정확히 누가 페터 레인(Fatter Lane)을 조직하고 또한 그 규칙을 제정하였는지-웨슬리인지 뵐러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 페터 레인의 규약을 보면 매주 기도와 고백을 위한 모임을 가졌고 5-10명쯤 되는 사람을 조로 나누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새로운 회원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리고 매월 한 번은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애찬을 나누고 매월 정한 회비를 냈다. 웨슬 리가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페터 레인은 “영국계 모라비안 교도의 모판, 즉 에클레시아(Ecclesia)가 된 에클레시올래(Ecclesiola)”가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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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5-08-11 13:3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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