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기 목사 (상리교회, 범사회문제대책운동본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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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법원이 “캘리포니아 주에서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포함한 가정 내 종교모임을 제한하는 규정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고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가 4월 11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미 대법원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행 중인, 가정 내 종교 모임을 3가구로 제한하는 규정이 종교 행사를 보호하는 수정헌법 제1조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은 “캘리포니아주는 가정 내 종교 활동과 비슷한 세속적 활동을 더욱 선호했으며, 미용실, 소매점, 스킨케어 서비스, 영화관, 스포츠 행사, 실내 식당 등에는 한 곳에 3가구 이상 모일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밝혔습니다. 산타클라라 카운티 제레미 윙 목사와 카렌 부쉬 사모는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부터 소그룹 가정교회 모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갖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 코로나19 방역지침이 종교모임을 제한하자 이에 대한 금지명령을 신청했습니다. 대법원은 5대 4로 종교모임 제한금지명령 찬성 쪽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금지명령에 찬성한 판사는 ‘클라렌스 토머스, 사무엘 알리토, 닐 고서치, 베럿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이었고, 이에 반대한 판사는 ‘엘레나 케간, 소니아 소토마요르, 스테판 브라이어’였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에서 종교모임을 가질 경우 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고려해볼 때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코로나 방역지침에 따라 수도권은 2단계를 적용하여 교회의 좌석수 20%이하로 제한했고 비수도권은 1.5단계를 적용하여 교회의 좌석수 30%이하로 제한했습니다. 또한 사적인 모임을 금지한다고 하며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을 4명 이하로 제한하였습니다. 이러한 제한은 식당이나 카페에 비하면 너무나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분명히 형평성을 잃은 정책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정부의 일에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성명서만 내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대부분 중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그렇게 정부에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여당 국회의원들 중에는 ‘예배 금지법’을 기안해서 올려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지켜만 보고 있어서 너무도 마음이 아픕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공공기관의 지시를 이해하고 따라야하는 것일까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이런 행정조치는 공권력을 이용하여 강압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못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로마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며,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공예배는 반드시 한 자리에 모여서 드려야합니다. 공권력이 나서서 예배금지 조치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온라인예배를 권하더라도 선택은 교회에 맡겨야합니다. 교회의 자율적인 선택에 따라서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입니다. 공권력이 교회에 대하여 방법을 지시하고 따라줄 것을 권할 수는 있어도 강압적으로 ‘예배금지’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보면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특히 ‘네로 황제’는 로마시에 방화를 저지르고 모든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점점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조리 잡아 들였고, 화형을 시키거나 맹수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로마시내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성도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인 ‘카타콤’이라는 지하묘지로 숨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로마를 떠나 해외의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지하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이 지하동굴에서 태어나서 바깥세상은 구경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왜 지하동굴에서 살아갔을까요? 왜 자기 자식들도 지하 동굴에서 살아가도록 했을까요? 그들이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생활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달랐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모여야 했고, 모이면 찬송을 부르며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리다보면 모임장소가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던 성도들이 잡혀가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배드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내걸고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시대와 코로나가 퍼지는 지금 시대를 비교해볼 때 어느 시대가 더 위협적일까요? 초대교회시대와 코로나가 퍼지는 지금 시대를 비교해볼 때 어느 시대가 더 근심이 많았겠습니까? 초대교회시대와 코로나가 퍼지는 지금 시대를 비교해볼 때 어느 시대가 더 두려운 환경입니까?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지혜가 부족해서 순교를 각오하며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예배가 전도보다 중요하고 선교보다 중요합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드시 막아야겠지만, 설사 차별금지법은 포기해도 예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방역을 명분으로 예배금지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오래 전부터 코로나방역을 핑계로 예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형평성 없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지나친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매일 가는 학교도 등교가 허락되었는데 정한 시간에만 드리는 예배에 너무나 많은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밀폐된 지하철은 매일 740만 명이 이용해도 늘 괜찮은데 교회는 안 된다고 합니다. “만일 예배제한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하는 교회폐쇄법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발의되었습니다. 만일 이대로 두고만 본다면 우리나라도 유럽교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최종상 선교사님이 쓴 ‘유럽을 향한 하나님의 심장소리’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유럽은 현재 세계에서 기독교가 성장하지 않는 유일한 대륙이다. 오히려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유럽이 기독교가 쇠퇴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참된 복음주의자들의 비율이 아프리카가 17.7%인데 유럽은 2.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유럽교회의 모범을 보였던 영국은 더 심각합니다. 한 달에 한 번 교회 출석하는 사람은 인구의 5%에 불과하며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겨우 2%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일어나서 ‘예배의 인원제한’이 철폐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폐쇄법’과 같은 반기독교적인 법이 시행되지 않도록 막아야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한국교회와 병들지 않은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후대에 부끄럽지 않도록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올바르게 세워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