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짙어 갈수록 채전(菜田)에 상치, 도라지, 더덕 등 채소들이 싱싱하게 돋아 오르고 꽃밭에는 모란, 작약 등 이름 모를 꽃씨들까지 싹이 터 오르며 머지않아 꽃피울 희망을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어김없이 뾰족 뾰족 원치 않는 잡초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활개를 치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야채와 꽃싹들을 밀치고 짓누르며 위세를 부립니다. 얄밉고 귀찮은 그 잡초 녀석들은 뿌리지도 않고 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억세게 자라고 또 종류도 다양한지 모릅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는 잡초들 사이에서 신음하는 야채와 화초들을 보면 측은하고 안쓰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뽑고 뽑고 눈에 띌 때마다 제거하지만 그 놈의 잡초는 마치 저항이라도 하는 듯 잘도 돋고 잘도 자랍니다. 아무리 사회를 정화하고 개선해도 그곳에 또 다른 범죄가 넘치게 발생한다는 롬브로조의 범죄 포화설처럼 잡초는 또 돋고 또 자랍니다.
한 번은 잡초가 미워서 제발 잡초 없는 남새밭을 만들 수 없을까 궁리하고 고민하다 제초제로 사정없이 살포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해에 야채와 꽃씨들이 뿌리고 심어도 독소 때문에 싹도 잘 안날 뿐 아니라 성장력도 전년과 달랐습니다. 지력(地力)을 생성하고 땅갈이를 하여 토양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 지렁이나 땅강아지 등 각종 미생물들까지 사라져 버려 이제는 땅이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양자(培養者)들의 아픔과 고통을 잡초와 싸우면서 깊이 깨닫곤 합니다.
잡초가 있으면 자라나는 곡식들이 얼마나 해를 입고 고통당하는지를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더 잘 아실 텐데 왜 예수님께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고 가만두라고 하셨을까요?(마 13:29) 잡초가 얄밉고, 그 위세 앞에 신음하는 어린 싹들을 가꾸며 한 생명을 훤화보다 귀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그 사랑을 실감하곤 합니다.
잡초를 뽑을 때는 발본색원(拔本塞原)을 해야 합니다. 잡초들의 잎이나 줄기만 따내고 잘라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뿌리가 더 강해져서 번식력을 더욱 왕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뿌리까지 뽑아내려고 하면 곁에 있는 주인공들이 상하거나 뽑혀날 때 얼마나 마음이 짠하고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심조심 잡초를 뽑습니다. 손이 시리고 허리가 아파도 그래도 참고 뽑고 또 뽑습니다. 야채와 꽃밭을 가꾸고 그것들을 통해 유익을 얻고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는 이상 잡초와의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배양자들의 이러한 수고 없이 곡식이 탐스럽게 자라고 꽃밭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매일매일 실감하기에 겸손해지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잡초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좋아서 노래하며 춤추는 채소와 꽃들을 보고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피곤해 할 줄 모르는 농심(農心)을 이제야 더욱 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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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1-04-28 15:5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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