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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빛으로 세상을 보라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얼마 전 나의 오랜 지인으로부터 아주 짧은 동영상을 받았다. 2분11초에 불과한 동영상이지만 감동은 대단했다.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 다리에 장애가 있어 한쪽, 혹은 양 다리에 의족을 하거나 한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고 겨우 걸어야 하는 초등학생들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 마련된 장애학생달리기대회였다. 경기장 트랙을 제대로 갖춘 시설이 아닌 흔히 볼 수 있는 먼지가 푸성이는 운동장이었다. 그래도 어른들은 여러 개의 시상 트로피를 준비해 놓았고 본부석도 갖추어져 있다. 10여 명의 선수들은 출발점에 일직선으로 서 있고 양 옆에는 응원하는 가족이나 주민들이 격려하는 모습이 보인다.


드디어 총소리와 함께 10여 명의 선수들이 저마다 불편한 몸 동작으로 50여 미터 쯤 앞에 가로지른 빨강색 결승 테이프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뿔사 의족으로 달리던 한 선수가 그만 자기 발에 걸려 넘어져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엄마, 엄마!”하고 울부짖는 것이 아닌가!


1등으로 달려 결승점에 다달아 빨강색 테이프를 잡으려던 의족을 한 선수가 ‘엄마’를 부르며 넘어져 있는 선수를 되돌아보는 순간, 그는 잡으려던 테이프를 그냥 놓고 지친 목발로 다시 넘어진 동료 선수를 향해 달려가자 모든 선수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뛰어가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밝은 웃음을 띄우며 똑같이 한 줄로 넘어진 선수와 어깨동무들을 하고 결승점 빨강 테이프를 동시에 잡는 아름다운 경기 모습이었다.


트랙 양 옆에 운집한 관중들은 물론 주최석에 앉아 있던 인사들과 멀리서 이 모습을 보며 만면에 웃음을 뛴 중년 신사-아마 넘어진 선수의 아버지인 듯-할 것 없이 모두 기립 박수로 열광하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다.


요즘 같은 삭막한 세정(世情)에 최소한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그래서 지인은 이 동영상을 나에게 보냈으리라. 나아가서 가슴 뭉클한 영상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삭막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 어느 때 어느 곳이고 밝은 부분도 있고, 어두운 구석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 보이며, 세상을 대하는 삶도 달라진다.


옛날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불쌍하며 압제 받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시고, 그들을 돌보며 해방시키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말씀과 삶’으로 보여 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눈길로 이웃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몸에 장애가 있어 불편하지만 빨리 움직이며 달려가는 결승점에선 그 어린 선수가 우승의 무대 뒤에서 쓰러져 절망하는 동료 선수의 이웃이 되어 주어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그 사랑의 눈길이 경기장에 있는 뭇 사람들을 열광케 했듯이 오늘 우리 교회에 그 사랑과 배려가 충만되어 세상이 흠모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솔직히 나는 현실의 모순과 왜곡된 현상을 보지 못하고 거창한 이론과 고상한 사상을 외치는 소리가 허언(虛言)으로 느껴져 불신한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하고 불쌍한 양 무리들의 깊은 심연(深淵)을 보지 못하는 목자는 목자(Shepherd)가 아니라 직업인(Job)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을 ‘선한 목자’라 하셨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까지 하셨고 또 버리셨다(요10:11). 사명에 사는 섬김이의 표상이다. 이에 반하여 양 떼의 영혼의 깊은 곳을 볼 줄 모른다면 얼마나 얼빠진 일인지 생각해 보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면서도 비참한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을 <몽상꾼>이라 한다. <몽상꾼>은 자신에게만 집착할 뿐,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특징이다. ‘섬김’이란 단어 자체가 보이지 않은 인간이다.


이 땅의 교회 일부가 그동안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 세상의 염려 거리가 되었었다. 있는 자 편을 들었고, 힘 있는 자들을 축복했고, 그들이 주는 혜택과 권력을 누리며 살았다.


건물의 크기와 사람의 숫자와 헌금의 규모가 목회 성공의 학설이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목회에는 성공은 없다. 성공이 있다면 그것은 ‘금송아지’이다.  어쩌면 모두가 성공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는지 모른다. 저마다 ‘성공’이라는 신(금송아지)을 섬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쳤고, 영혼까지 팔지는 않았는지. 모두가 성공 때문에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를 입다 보니 성공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우리 영의 세계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언필칭 교회는 성공 레이스를 향해 달리는 경쟁 사회가 아니다. 달리다가 넘어져 ‘엄마!’(하나님이여!)하고 부르며 절규하는 동료 선수를 일으켜 세워 ‘함께’ ‘더불어’ 결승점을 밟는 장애인달리기대회 선수들처럼 하나님의 눈 빛으로 넘어진 세상을 보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함께, 더불어 나누는 사역이 목양이요,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목양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실함이 있을 뿐. 성공문화야말로 목양자들에게 실패의 고통을 안기는 주범인 것을 알자. 모두가 일어나서 감사하고 만족해하는 박수갈채가 있는 목장(牧場)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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