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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숨결] 이재완 목사의 '존 웨슬리의 "작은 교회" 운동'

6장 “교회안의 작은교회”의 신학적 고찰
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1. ‘작은 교회에 대한 이해

 

웨슬리는 이 내적 죄를 죄의 뿌리 혹은 원죄라고 이해한다. 행위의 죄들을 용서받았다 할지라도의인화의 순간에내적 죄악은 계속 성도들에게 남아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성도들을 지배하거나, 조종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완전의 은혜로 성화받을 때까지 우리의 내적 죄악과 싸우고, 갈등을 겪으면서 계속해서 회개해야 한다.

완전의 은혜는 모든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완전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라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성도도 의식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인 죄는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가 성화 과정에 순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이 수양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올더스게이트에서의 체험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칼빈의 성화론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칼빈(Calvin)은 인간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그런데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기독교강요는 예정론보다 성화론이 더욱 강조된다. 역사신학자 씨버그(Reinhold Seeberg)나 워커(W. Walker)도 그렇게 강조하였다. 칼빈은 우리의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적극적 역할 곧, 3의 용법(Tertiusus us Legis)을 강조한다. 칼빈은 그의 성화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이제 네 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지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중재(intercession)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며(dwells in us) 그 힘으로 우리 육의 정욕을 날로 더욱 더 죽이신다(the mortification of the lusts of our flesh).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된다(consecrated to the Lord in true purity of life). 그리하여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는 은총의 현재 여기에서”(Here and Now)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깊이 통찰하였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여 결코 인간의 책임을 절대 도외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웨슬리의 견해는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역사하신다는복음적 신인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과 일치한다.

웨슬리가 주장하는 복음적 신인협동설은사람은 자기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한다는 것으로서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하나님이 라고 주장하는 면에서 종교개혁자와 일치하지만, 인간의 책임성-응답-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가톨릭의 논조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은은총 안에서라는 점이다. 이 면에서 웨슬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위험성에서 벗어난다.

윌러(Wheeler)에 의하면 자유의지에 관한 조항의 첫째 부분은 뷔르 텐베르그(Wurttenberg)/ 확인/ 고백서와 일치되고 그 둘째 부분은 성 어거스틴의참회록과 일치하는데 웨슬리는 39개 신조에 나타난 것과 같은 서술을 한다.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간의 상태는 철두철미하게 타락하였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힘과 행위만으로는 믿음을 소유할 수 없고 하나님을 추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재 은혜 없이 인간은 하나님께 합당한 어떤 선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선재 은혜 없이 우리는 선한 의지를 가질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39개 신조에 나타난 사상과 일치하지만인간이 먼저 구원을 위한 선행을 행하면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신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은 타고난 의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말이 원죄에 관한 조항에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 말은 결국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본성이 타락(Depravation natural)을 하였으나 이것은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Tota Depravatio)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펠라기안주의를 배척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웨슬리의작은 교회들은 단지 행정적인 조직이나 양적인 성장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성화훈련이라는 질적 성숙(maturity)을 도모하는 목회적이고 영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신도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간증 형식으로 고백하고 나누며(sharing), 사랑으로 서로 권면과 돌보며 격려와 위로하는 책임 의식(accountability)을 가졌다. ‘작은 교회의 모임을 통하여 소규모 단위의 성경공부, 기도회, 그리고 신앙적 담화를 위한 좋은 장이 마련되었다. 작은 교회모임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파선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것, 또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랑의 선행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신도들이작은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공동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며, 서로 협조하고, 응답하며, 격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작은 교회를 통한 공동체적인 성화생활을 강조한 반면에, 개인적, 수도원적, 신비주의적, 은둔적 성화생활을 비판하였다. 고독하고 은둔적인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웨슬리는 못박아 언급하였다. 특히 신비주의가 현실 도피적일 뿐만 아니라 성서의 말씀보다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웨슬리도 체험을 강조하였으나 체험보다 성서의 말씀을 더 강조했고, 성서를 떠난 주관적인 체험의 위험성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로 보았기에, ‘작은 교의 영성운동은 내면적이면서도 외향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성화생활의 실천은작은 교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황에 결정적인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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