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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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確證偏向,Confirmation Bias)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이는 기존의 자기 신념(信念)에 부합되는 정보나 근거만을 찾으려고 하거나, 이와 상반되는 정보를 접하게 될 경우 무조건 무시하는 인지적(認知的) 편향성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자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옹고집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접해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중립적인 경향을 보이기보다 자신의 기존 주장이 의견의 수준을 넘어서 ‘신념(信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울의 광화문(光化門)에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고 물을 때, 그곳을 보고 온 목격자보다 못가 본 옹고집이 이기는 격이라고나 할까. 현대 우리 사회나 교회 공동체가 이를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요 깊이 앓고 있는 중병이다.
성경에도 확증편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예레미야 41장 15절에서 42장 6절에 나타난다.
북 이스라엘이 BC.722년 앗수르에 멸망 당한 이후, 근근이 버텨오던 남 유다 역시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다. 바벨론은 유다의 귀족 중 그댜랴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식민 통치를 펼친다(렘40:7).
유다의 왕족인 이스마엘이 암몬의 힘을 빌려 그다랴를 살해하고 바벨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자, 또 다른 군사 지도자 요하난은 이스라엘에 의해 암몬으로 잡혀가는 백성들을 구해내어 이스마엘의 의도를 막아 냈으나 이스마엘이 그댜랴와 바벨론 군사들을 죽인 사실로 인해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려고 한다.
이 글에서 인용한 성경은 애굽으로 가려는 요하난과 그 일행이 예레미아를 찾아 과연 애굽으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묻고 있는 장면이다. 언뜻 보면 요하난이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예레미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레미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한 후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전하자(42:19) 그 어떤 말씀이든 따르겠다며 하나님의 뜻을 구해 달라던 요하난이 예레미아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반항하며(43:2) 유다 땅에 살려고 하던 남녀노소를 이끌고, 심지어 예레미야까지 강제로 애굽 땅으로 데리고 간다(43:7).
이상과 같은 요하난의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살 길을 애굽으로 가는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만일 예레미아가 하나님께 이 문제를 놓고 응답을 구한다면 ‘애굽으로 가라’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만일 예레미아가 다른 대답을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예레미아가 거짓을 말한다는 자기 고정관념에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이와 같은‘확신 편향’이다.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응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자기 확신은 선(善)과 악(惡)을 구별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독선을 일삼는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경향성(傾向性)이라 할 수 있다.
수직적 계급 사회를 이끌어 온 로마가톨릭교회에 ‘저항'(protestant)하여 수평적 평등 사회를 이룩한 개신교회의 특징은 ‘지체 의식’이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도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종종 선입견, 내지 편견이 사실(fact)보다 우선하여 판단하고 결론을 내릴 때가 많다. 먼저 입력된 정보가 건전하고 사실에 기반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평생을 왜곡된 그림자에 가려 공동체의 평화를 훼손시키는 범죄를 저지르기 십상이다. 뇌가 팩트에 끌리기 보다는 자기 세계가 전부라는 아집이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입력된 정보가 옳다고 철석 같이 믿었다가 오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 사실을 정정한다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악습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편향된 고집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로마서 10장 17절이 그 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입력된 정보(편견)를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변치 않는 진리에 맞춰 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열린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채워지는 자아 변화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막판에 하나님계서는 무엇을 믿느냐,의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절묘하게 주신다. 내 인생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살아갈 이유와 용기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나올 게 없을 때가 데이터베이스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통째로 바꿔야 할 때다. 내 경험과 지식과 생각의 데이터베이스는 이미 유통 기한이 이미 오래 전 지나서 폐기해야 할 골동품인 것을 깨닫게 하신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 는 추상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밤낮으로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구체적인 매뉴얼이다.
나의 삶을 결정하고 선택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근거요, 삶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능력임을 긍정하는 전인적 돌아섬의 회개, 곧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주시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기독인의 영적 회복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