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중추절은 필자에게는 아버지께 대한 자식으로서의 불효했던 회한이 깊게 서려 있는 명절이다.
아버지의 생신일은 (음)1892년 8월 14일로 추석 전날이다.
그리고 별세하신 날은 회갑 일을 열이레 남긴 (음)1953년 7월 28일이며 사인(死因)은 필자로 인한 열사병을 앓으시다가 영면(永眠)하셨기에 마음이 아프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여 우리 조국이 식민지배에서 패망하자 아버지의 주도로 일본에서 귀환한 우리 가족이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채 안정되기도 전에 또다시 6.25 한국전쟁에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아침은 개성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으며,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론이 얼마나 허구에 찬 무책임한 통치자의 언어인가를 나이 어린 필자가 한탄할 만큼 치욕스러운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북위 38도선 전 전선에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남침을 감행한 북한의 김일성 공산당은 파죽지세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여 만에 낙동강 전선 남쪽 일부 영남 지방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을 장악하는, 참으로 어이없는 적화통일 전쟁이었다.
도대체 이런 허술한 정부가 또 어디 있으랴!
우리 고장에도 자치적으로 인민위원회, 보위부 등 여러 기관들이 들어서면서 당시 하급 계급에 있던 인물들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죽창(대나무 끝을 날카롭게 자른 어른 키보다 짧은 막대기)을 휘두르며 주민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제와는 또 다른 엄혹한 공산 치하에서 뜻하지 않게 우리 가족은 부르조아(bourgeois:자본가 계급) 반동분자로 몰려 임의동행 형식으로 끌려간 장형께서는 보위부에서 초죽음이 될 만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인민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아 광주형무소에 수감되는 비운을 맞았다.
거기다가 중형은 인민군 지원 명령을 받자 스스로 피신하여 국군에 입대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 행방을 알 수 없는 단절 상태에서 몇 달 후, 필자를 의용군으로 차출한다는 비밀 전언을 들으신 부모님은 너무도 가혹한 시련 앞에 그럴 수 없다고 하시고 동복과 주먹밥, 그리고 비상금을 챙겨 주시고는 어두운 밤을 기다려 남쪽으로 가라 떠나보내시며 울음을 삼키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여 마음이 아리다.
낮에는 가급적 숨어 있거나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 걷기도 하는 숨 막히는 위험한 도보 이동은 실로 생사의 외줄타기였다. 뿐이랴! 오랜 걸음으로 발바닥이 허문 통증과 굶주림은 너무도 큰 형벌이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생존 의식이 상대적으로 강렬했던 것은 이미 일본에서의 태평양전쟁으로 다져진 경험과 귀국 후 토종 한국인 동료 학생들과 사람들로부터 또 다른 상처, 즉 “왜놈”, “쪽바리” 등등 일본인 취급을 받으면서 온갖 시기와 조롱은 물론, 폭언과 약탈, 폭력까지 당했던 5년이라는 치욕(恥辱)의 세월 속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공부다”라는 결심의 연장선상에서 난생 처음 떨어지는 부모님과 누나와의 별리(別離)가 가능했었다.
국내 지리나 상황에 전혀 무지했던 이방인과도 다름없는 필자로서 아군과 공산군의 전선에서의 싸움보다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작은 전쟁으로 살기(殺氣)가 등등한 공산 치하를 벗어나는 피신길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파란곡절(波瀾曲折)의 행로였다.
걷고, 뛰고, 숨고, 붙잡혔다가 도망치고, 학살 현장을 목격하는 전장(戰場)을 용케 뚫고 천신만고 끝에 경상남도 울산읍까지 갔으니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당시는 비신자(non Christian)- 천우신조였다.
돌연한 피신이라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통치하는 영역을 찾아 나선 것이다.
30년 이상 일본에서 사시다 환국하신 부모님으로서도 막내 아들을 어디로 보내면 안전하리라는 밑그림을 그리시기에는 참으로 막연하셨기에 “남쪽으로 가라”고만 하셨을 것이다.
인공기(人共旗)와 빨간 완장을 찬 사람들이 설쳐대는 집 동네를 떠나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는 동선은 생사를 넘나드는 행로였는 바, 특히 섬진강을 낀 지리산 자락에 둘러싸인 구례, 광양, 하동 지역은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밤에는 공산당 빨치산(게릴러)이 치안을 유지하는(?) 기현상으로 민간인의 희생이 교차하는 그 무법 지대의 사선을 뚫고 경상남도 고성까지 옮겨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자로 예정하신 은혜의 방편임에 틀림이 없다.
고성읍이 멀리 바라보이는 동네의 한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높이 게양되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개울가, 언덕 밑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 몸도 더 이상 걷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인적이 드문 개울물에 들어가 그동안 절었던 몸을 씻는 데 장거리 보행에 헐어버린 발의 통증은 극심하였다.
그럼에도 몸을 씻고, 다시 옷을 입으려는데 경찰과 사복을 입은 청년 등 다섯 사람이 나타나 필자를 검문하는 것이었다.
소지품이라야 겨울 교복과 교과서 몇 권, 갈아입은 내복 뿐인 것을 확인하는 한편, 학생증과 고성에 온 목적을 묻는데 한국말이 서툴다고 경찰서로 임의 동행하게 되었다.
필자가 도저히 걷지 못하자 발을 보고 측은히 여긴 경찰 아저씨가 청년에게 업게 하여 약국에 가서 약사 부인에게 부탁하여 양 발의 헐어버린 환부를 소독하고 가루약을 뿌린 다음 붕대로 감아 주는 선의와 함께 약과 붕대를 봇짐에 넣어 주는 것이었다.
약값을 지불하려는 필자의 돈을 굳이 받지 않고 “이 난리 통에 잘생긴 학생이 불쌍하다. 꼭 살아서 성공하라”는 약사 아주머니의 격려 또한 잊을 수 없다.
경찰서에 간 필자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경찰 아저씨와 업어 준 청년(형사)은 직원 숙직실로 안내하여 한 잠 자라는 배려까지 해 주었지만 긴장 때문이었을까 맑은 정신으로 누워 있었다.
2시간 쯤 흘렀을까, 깜빡 잠이 들었는데 “고성에서 마산까지 운행하는 군용 트럭이 있는데 그 편에 마산을 가면 학생이 일할 곳이 있을 것이다”라는 경찰 아저씨의 친절한 말씀을 듣고 자전거에 태워져 군용트럭(GMC)의 출발 지점에 가서 마산을 향했다. 한없는 고마움은 진정 전쟁 속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다.
마산 시외버스정거장에 내린 필자는 부산행 버스에 올랐다. 생존의 문제 해결은 부산이 유리할 것 같아서였다.
버스를 타자마자 얼마를 잤을까 버스 옆 자리의 아주머니의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부상을 입고 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편지를 받고 긴급히 울산을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부산 가는 것도 초행길이며 글자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필자 역시 한국 지리에 무지해서 편지 봉투를 보여 주는데 울산의 제 23육군 병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순간 필자의 머리속에 전광석화처럼 국군에 입영했다는 둘째 형 생각이 나면서 혹시나 하는 예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부모님이 주신 돈을 거의 쓰질 못했던 필자는 고성에서부터 약값과 식비 및 교통비로 쓸 뿐이었는데 하늘의 구름 잡는 심정으로 아주머니와 동행하여 부산을 경유 울산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