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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평양 신학교 교수

<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에서 사역하면서 멀리 평양신학교에까지 출장 강의를 수차례 했다. 유진 벨이 맡아 수고해야할 역할과 책임 분야는 너무도 많았다. 목포에 이은 광주에서 사역하는 그의 중년기는 참으로 바쁘고 벅찬 나날이었다. 그가 전라남도의 최초 선교사로서 뒤이어 합류한 후배들을 이끌고 격려하며 함께 개척하고 수행해야할 과제가 많았다. 북문안교회 담임 사역과 광주 서북부 지역 순회 전도하는 1차적인 자기 책임 사역을 비롯해서, 광주 목포 일대에서 벌린 병원과 학교 사역 등 여러 일들에 대한 행정적 업무 역할이 그에게 중대했다. 오웬 선교사가 너무 일찍 그의 곁을 떠나는 게 아팠지만, 계속 이어지는 후배들의 합류로 인해 그가 벌이는 광주 전남의 사역은 보다 확대되었고, 그들 각자에게 적정한 업무 분장으로 수고의 짐을 나눠주고 모든 일들을 감독하였다. 그 바쁘고 중대한 선교 사역의 와중에 그는 또한 여러차례 시간을 내어 멀리 평양신학교에 출장 강의를 다니기도 했다. 

한국 교회사에서 서울과 함께 평양은 대단히 중요한 성지였다.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이 땅의 교회와 기독교 역사 발전에 대단한 기폭제가 되고 원천이 되었다. 더하여 평양은 한국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각 선교부마다 선교 스테이션에 남녀 학교를 세우고 교육 사역을 벌인 것은 전국에 걸쳐 수 십여 개가 되지만, 이 나라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 교육 기관들은 모두 평양에서 최초로 시작하였고 한동안은 이 평양에만 유일하게 존재했다. 목회 사역자를 훈련하는 평양신학교,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한 숭실전문학교, 그리고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외국인 자녀학교 등은 특별히 한국에서 사역하는 해외선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평양에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평양신학교는 한국 장로교회 사역자를 훈련하고 배출하는 교육기관으로 1901년 개교하였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4개의 해외 선교회, 즉 미북장로교, 미남장로교, 캐나다장로교, 호주빅토리아장로교의 조선선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함께 시작하고 운영하였다. 선교공의회는 평양 선교부를 개척하여 훌륭히 사역하고 있던 마펫에게 첫 교장의 직임을 부여하였고, 마펫은 평양 대동문에 있었던 자신의 집에서 학생들을 모아 한국 장로교 신학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평양신학교를 연 마펫(Moffett, Samuel Austin, 마포삼열, 1864~1939) 선교사는 인디애나주 메디슨에서 출생하여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 1월 내한하였다. 미북장로교 조선선교회 내에서 특별히 평양 선교부 개척 책임을 맡아 일하였다. 몇 차례 전도여행을 거치며 1893년 본격적으로 평양에 거주하면서 이 도시를 비롯하여 평안도 일대의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평양신학교를 책임 맡아 한국 장로교 목회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마펫과 미북장로교 선교회가 주로 학교를 책임지고 이끌었지만, 설립 정신은 4개 선교부가 함께 연합하여 운영하려고 노력하였다. 교수진이나 학생 모집, 그리고 운영 경비 등을 같이 논의하고 책임졌다. 신학의 주요 과목들을 각 선교회별로 나뉘어 그 과목은 해당 선교회가 교수를 파견하여 해결하도록 했다. 

미남장로교는 ‘조직신학’ 과목을 주로 맡았다. 호남에 온 선교사 가운데 학식과 가르침이 남달랐던 이들이 돌아가면서 평양에 출장 강의 수고를 하였다. 맨 처음 평양신학교에 출강한 미남장로교 선교사는 1904년의 전킨이었다. 이후 유진 벨과 불, 멕커첸 선교사 등이 이어받아 틈틈이 평양에 출장 강의를 다녔다. 초기엔 1년 3개월 학기제로 5년 과정이었다. 1년 중 9개월은 현지 각자 교회에서 실습 목회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출강 교수들도 두세 달씩 와서 수고하였다. 교수나 학생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었고 교통의 불편함과 사역지의 현실 등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


레이놀즈와 남궁혁
 
이런 가운데 미남장로교에서는 레이놀즈가 평양에 체류하면서 전임교수로 사역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 장로교단의 신조와 정치 헌법 등 교단의 골격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학교 강의를 통해 한국의 모든 장로교 목회자들에게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전수하며 한국 장로교의 신학 체계를 또한 뿌리 내리고 다졌다. 간혹 레이놀즈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거나 레이놀즈 사후엔 그를 대신하여 크레인(Crane, John Curtis, 구례인)과 하퍼(Hopper, Joseph, 조하파) 등이 미남장로교의 교수 책임을 이었다. 미남장로교의 장학사업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신학박사가 된 남궁혁은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평양신학교 전임으로 교수 사역하였다. 미남장로교 출신의 레이놀즈와 남궁혁은 한국 장로교 신학교의 핵심 기둥이었다. 

최초의 교육관은 1908년에 시카고의 맥코믹(McCormick, Nettie F.) 여사가 헌금한 5천 5백 달러로 건축하였고, 3만 5천 달러로 1922년 현재의 교육관으로 옮겨 왔다. 맥코믹 여사는 1910년에도 두 동의 기숙사 비용을 보내 주었고, 1912년에도 1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8에이커의 캠퍼스에 교수들을 위한 6채의 사택이 지어졌고, 알렉산더 기숙사는 미남장로교 선교회에서, 빅토리안 기숙사는 호주장로교 선교회에서 각각 세웠다. 그 외 무명의 헌금으로 마르다기념관을 포함한 세 동의 기숙사가 있다. 

도서관에는 3천 권 이상의 영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 된 책이 있다. 이곳엔 한국장로교총회가 고 언더우드 선교사를 기념해서 제공한 ‘언더우드 콜렉션’이 포함되어 있다. 신학교가 필요하는 물품으로는 ‘도서관 시설’을 위해 7,500달러를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1918년부터 ‘신학지남’이 발행되어 왔으며, 현재 격월로 간행되고 있고, 남궁혁 교수가 편집장으로 있다. 1927년 12월에는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 “성경 사전”이 간행되었다. 레이놀즈 교수가 편집 책임을 맡아 여러해 동안 수고하였다(해리 로즈, “미국장로교 한국선교역사”).

신학교 운영은 4개 선교회가 함께하여 연합 정신으로 하였지만, 각 선교회별로 독자적인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학교 건물을 짓고 운영하는 데 미국 교우들의 후원이 특별하였으며, 교수 사택과 봉급, 그리고 학생 모집과 학생 등록비나 평양에서의 기숙은 각 선교회가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호남 출신의 최초 목사후보생은 1904년에 입학한 윤식명, 최중진, 김필수 3명이었다. 미남장로교 선교회는 이들의 학비와 기숙, 오가는 교통비용 등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미남장로교 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지었는데, 이 역시 군산에 잠시 왔다 미국에 돌아간 알렉산더 선교사의 큰 후원이 밑받침이 되었다. 

유진 벨 선교사는 비정규 시간 강사 격으로 평양 신학교 출강을 종종했다. 1907년 가을에 첫 출강을 하여 한달 반 정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9년에도 평양에 가서 6주간 강의하였고, 이때 알렉산더가 보내준 헌금으로 레이놀즈와 함께 신학생을 위한 기숙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1917년 6월에 유진 벨 교수는 남궁혁의 도움을 얻어 찰스 핫지의 “로마인서 공부”를 번역하여 평양에서 발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곽안련 교수와 함께 52쪽 분량의 “예배모범”을 저술하여 경성에서 발행하였다. 이듬해 1919년 7월 16일에는 모교인 루이빌센트럴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1년 6월에 미남장로교 선교회의에서는 유진 벨을 평양신학교 전임교수와 문서사역자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 안식년을 마치고 1922년 봄, 한국에 복귀한 유진 벨은 평양신학교 교수 사역과 함께 ‘평양숭실전문학교’ 3년 이사직을 맡았다. 

유진 벨 교수는 평양신학교 논문지, ‘신학지남’에도 몇 차례 논문을 기고하였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교회의 연합사역을 강조하고 해외에서 온 4개의 장로선교회가 조선에서 지난 수십년간 연합을 잘 이루고 훌륭하게 단합하여 일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동시에 그는 미남장로교 개혁신학의 후예답게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중심으로 한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신학 논증을 펼침으로써, 평양신학교 교수로서의 정체성과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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