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읍 북정동에 소재한 제 23 육군병원은 울산초등학교를 수용하여 낙동강, 안강 전투에서 부상당한 중환자들을 치료하고 처리하는 후방 군병원이었다.
면회소에서 아주머니의 면회 신청을 도왔고, 필자는 막연하게 형님의 이름과 생년월일만 써서 면회 신청을 했는데, 아뿔싸, 로또 복권 당첨의 기쁨이 이러하랴! 형님은 안강 전투에서 왼쪽 어깨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이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이라는 전언이었다.
정말 기적이다. 하늘의 뜬 구름을 잡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긴장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병사의 부축을 받아 목발을 짚고 들어서는 형님, 심청전의 대사처럼 “꿈이냐? 생시냐?”였다.
형제는 기적처럼 만나게 된 데 너무 감격하여 한없이 붙들고 울었다.
더욱 반가운 것은 한 달 치료받고 퇴원하게 되는데, 고학력자여서 본 병원 기관병으로 특명을 받아 근무하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형제는 떨어질 줄 모르고 부모님, 가족 걱정, 현재 필자가 처한 입장 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마침 울산농고 3학년인 이채봉이라는 학생이 카메라맨으로 병원 봉사를 하는데 하교를 하면서 면회소에서 만나 필자의 숙박은 채봉 형 댁에서 해결하게 되었다.
면회는 날마다 했다. 그리고 초등학생 과외를 시작하여 식사와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길이 열렸다. 천신만고의 고달픔과 고초가 한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형님도 퇴원하여 기관사병으로 근무에 들어갔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나는데 형님이 부산 제 3 육군병원으로 전속을 가게 되어 다시 헤어져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1953년 7월 28일, 한국 전쟁은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북한, 중공군 대표 간의 정전협정이 채결되어 당시 155마일 전선이 현 상태대로 휴전에 들어갔다.
우편통신이 재개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필자는 즉시 부모님께 아들의 무사함과 중형의 소식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보름 쯤 지났을까 아버지께서 울산의 막내아들을 찾으러 오신 것이다. 그때까지 민간 여객기차는 빨치산의 습격으로 운행되지 못하자 아버지는 군 고위층의 메모지를 받아 호남선과 경부선은 군용기차를, 부산에서 울산까지는 인반 객차로 3박 4일을 걸려 오셨다는 것이었다.
자식으로서 반가움에 앞서 감사와 죄송함의 눈물을 쏟으면서 아버지께 큰 절을 올리고 엉엉 울었다. 항상 강렬함을 보여 주시던 아버지의 눈물을 난생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오랜 기차 여행으로 지쳐 계셨다. 눈치껏 필자는 약국에 가서 몸살약과 피로회복 약, 그리고 간식거리를 구입하여 드시도록 했다.
학교에서 하교하는 채봉 형을 아버지께 인사를 시키고 우리 부자는 육군병원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숙소를 옮겼고 아버지의 호의로 채봉 형과 함께 외식을 하였다. 과묵하신 아버지는 몇 번이고 하신 말씀, “막내야! 미안하다”였다. “미안하다”는 말씀 가운데는 많은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는 것을 훌쩍 자란 자식으로서 느끼는 바가 있었지만 한사코 아버지를 위로해 드렸다.
가장 기쁜 소식은 장형의 사형 언도 날이 알려와 그날 11시에 시체를 수습해 가라는 구두 전언이 있었는데, 그날 새벽 국군과 경찰이 광주를 탈환하여 형무소를 개방함으로써 풀려 나온 형님은 걷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지만 기를 쓰고 집으로 향했고, 어머니와 형수, 그리고 두 사람의 장정들이 형무소를 찾아가는 도중에 출옥한 형님을 만나 들 것에 실어 농장에 있는 농막으로 모셔 치료 중에 있다는 생존 소식이었다.
한편, 그동안 피난 청소년인 필자를 여러 면으로 도와주었던 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울산을 떠났다. 부산 제 3 육군병원에 가서 중형을 면회하는 것 역시 극적이었다. 세 부자가 여관에서 1박을 한 다음 날 아버지와 필자는 부산진 역에서 군용 열차를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기차는 객실이 아니라 지붕까지 철판으로 둘러싸인 화물 칸에 두 사람만 타고 대전에서 호남선으로 환승하여 광주로 가는 코스였다. 늦여름이라 낮에는 화물차의 온도가 급상승하여 견디기 힘든 귀향길이었다. 군용 화물차라 변변한 음식이나 음료를 사서 먹을 역도 없었다.
대구나 대전 등 대도시에서는 국수 등 식음료를 파는 플렛홈에 기차가 서는 것이 아니라 화물을 취급하는 플렛홈에 세움으로 화장실 이용과 수돗물을 실컷 마시는 것 외에는 불가능했다. 기차가 엄한 경비 태세로 거의 논스톱이었다.
아버지와 필자는 열사병에 걸린 상태로 귀가하였다. 의사 선생이 왕진하러 오셔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으나 아버지께서는 병환이 더 깊어지셔서 안타깝게도 (음)7월 28일 오후 4시 어머니와 누나, 환자인 필자가 보는 앞에서 운명하셨다. 그날 낮에도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일본이 패망하자 아버지께서는 일방적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간다는 일념으로 귀국하셨지만, 당시 한국 사정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사업 실패와 사기에 휘말려 가산의 탕진은 물론 6.25 한국전쟁으로 갖은 고초를 겪게 된 모든 것이 아버지의 탓으로 여기셨던 회한(悔恨)을 “미안하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시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나라로 떠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추석 전날인 (음)8월 14일은 아버지의 생신날. 회갑 일을 열이레 앞두고 필자 때문에 영면(永眠)하신 특별한 날이어서 추석은 마냥 즐거운 날만은 아니다. 아버지의 눈물이 자식의 눈에 고이기도 하는 날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