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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신자는 교육하라

<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우리나라에 들어와 미션을 펼친 해외 선교회마다 지향하는 주요 3대 사역은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기 위한 진료, 그리고 신자의 자녀들을 모아 교육하는 일 등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주된 사역이기도 했다. 미남장로교 조선선교회는 호남의 5개 스테이션마다 3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 병원, 학교를 각각 세웠다.

불신자는 전도하고 신자는 교육하라. 이러한 명제 아래 교육을 위해 세웠던 학교들은 군산의 영명과 멜볼딘 학교, 전주의 신흥과 기전 학교, 광주의 숭일과 수피아 학교, 순천의 매산 남녀 학교, 그리고 목포의 영흥과 정명 학교 등이다. 호남의 최초 사학이며 기독교 학교로서, 현재까지 100여년 훨씬 넘는 전통과 역사 속에 호남의 청소년 교육을 감당해 왔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03년 목포에도 학교를 세워 교육에 또한 힘쓰기로 하였다. 지난 2년여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그가 다시 찾아와 이제 목포 교회를 회복하니 신자도 다시 늘어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교회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벨 선교사는 이들에 대한 주일학교 정도만이 아니라 주중에도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가졌다.

벨 선교사는 신자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열었다. 1903년 9월 15일 자신과 남자 성도를 중심으로 교사진을 꾸려 남학교를, 그리고 스트래퍼는 여학교를 각각 시작하였다.

임성옥, 유내춘 등 목포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시작한 목포 남학교는 유진 벨을 교장으로 교회 일군들이 교사로 참여하였고, 1906년에는 남궁혁이 교사로 합류하였다. 목포 세관원으로 일하던 남궁혁은 유진 벨 이후 목포 사역한 프레스톤에 의해 목포 남학교 참여하면서 예수 신자로 거듭났다. 남궁혁은 후에 광주 숭일고 교사를 거쳐 선교회 후원으로 미국 유학하여 우리나라 최초 신학박사,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한국인 최초 교수 등으로 한국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초등 과정으로 시작한 남학교는 1907년 10월 10일 중학부 과정을 신설하였다. 초등 과정에서는 성경, 국문, 산학을, 중학 과정에서는 성경, 역사, 과학 등의 교과를 배웠고, 오후 시간에는 실습으로 근로 사역 등을 하였다. 학생들은 주일 교회 출석이 의무였고, 주일 오후에는 거리 전도 활동이 필수였다.

학생이 점차 늘어나 80여명에 이르던 1908년에는 신축 교사가 필요했다. 10월 10일 새 건물을 지었는데, 당시 교장이었던 프레스톤 목사의 고향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탄버그 장로교회와 담임 왓킨스 목사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기부금 2천 달러로 강당과 교실 2칸짜리 겸한 40*42자 규모의 석조건물, 호남의 최초 근대식 학교 건물이었다. 후원자를 기려 존왓킨스아카데미(The John Watkins Academy)라 이름하였다.

1911년 3월, 중등과정 첫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1914년 영흥학교로 개명하였다. 영흥학교는 일제 말기 1937년 신사참배 거부하며 폐교하였고, 해방 이후 1952년 복교하였다. 목포 양동에 있었던 학교는 1980년 상동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 목포에 있는 존 왓킨스 학교의 1학년 남학생 아흔 세명! 한 명의 선생님이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맡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많은 수를 수용할 수 있는 큰 방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두개반으로 나뉜다. 그럼에도 학교에는 60명이 넘는 반이 있다.

젊은 두 남자 선생은 우리 미션 스쿨 출신이다. 한 명은 광주, 한 명은 제주도 출신이다. 두 사람은 일요일 오후의 주일학교를 맡고 있다. 모든 남학생들은 그 둘 중 하나의 예배에 참석하거나, 시내 혹은 가까운 지역에 퍼져있는 11개 중 하나의 예배에 참석한다. 이것들은 교회의 주일학교 위원회의 감독 하에 운영되어지며, 학교의 고학생 남녀 학생이 선생님을 돕는 일을 거의 맡고 있다(다니엘 커밍, “The Presbyterian Survey", 1929년 10월).

목포 여학교는 스트래퍼 선교사가 이끌었다. 한국인 교사로는 조긍선 등이 참여하였다. 1910년 6월, 보통과 첫 졸업생으로 박애순, 최자혜, 박경애, 김세라 4명을 배출했다. 박애순과 최자혜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여 나중에 교사가 되었다. 박애순은 광주수피아 여학교 고등과를 또한 1회 졸업, 교사를 지냈다. 최자혜는 미국 유학하여 대학교 학사 학위를 받고 1928년부터 모교 정명여학교 교사를 했다. 박경애는 소설가 박화성(보통과 2회 졸업)의 친언니였고, 김세라는 졸업 직전 일찍 결혼하였다.

1914년 3월에는 학교 이름을 정명학교로 개명하고 4년제 보통과와 4년제 고등과로 학교 체계를 개편하였으며, 동시에 첫 중등과정 졸업식도 하였다. 1923년 1월에는 석조 3층 240평 새 교실을 지었다. 미국의 맥컬리(Miss. Green McCallie) 양이 1만 불 기부하여서 맥컬리기념 여학교라 하였다. 선교부는 별도로 2,500불을 지원하여 70명 수용하는 기숙사 건립하고 1천 평의 운동장도 만들었다.

정명학교도 신사참배 거부하며 폐교했다가 해방 이후 복교되었고, 현재는 선교회의 유업을 잇는 호남기독학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1903년 시작할 때부터 양동 현 위치에 계속 있으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다.



1922년 커밍 교장과 함께한 영흥학교 교정과 학생


 
교육 선교사, 커밍과 유애나

유진 벨과 스트래퍼에 의해 시작한 목포 학교는 이후 여러 선교사들이 찾아 오면서 교육 사역에 수고하였다. 쥴리아 마틴, 맥머피, 조하퍼와 조마구례 등의 수고와 함께 커밍과 유애나 선교사는 초창기 오랜 시간 책임자로 있으면서 학교의 기틀을 다져 지금의 현대식 학교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커밍(Cumming, Daniel James, 김아각, 1892~1971)은 1892년 12월 17일 버지니아주 스탠턴(Staunton)에서 태어났다. 루이빌과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8년 26세에 목포를 찾아 주로 목포와 광주의 기독교 학교 책임 사역을 하였다. 1966년 74세 은퇴하며 조지아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다니엘 커밍은 동생과 함께 목포에서 일평생 형제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형이 주로 교육 사역을 한 반면, 7년 아래 동생인 부르스 커밍(Cumming, Bruce Alexander, 김아열, 1899~1988)은 주로 목포 인근의 농어촌 지역 순회 전도 사역에 전념하였다. 

정명 여학교의 초석을 잘 다졌던 이는 유애나 선교사였다. 니스벳(Mrs. Nisbet, Anabel Major, 유애나, 1869-1920)은 1869년 1월 19일 테네시주 클락스빌(Claksville)에서 출생하였고, 1875년 클락스빌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1899년 니스벳(Nisbet, John Samuel, 유서백, 1869~1949) 목사와 결혼하여 내한하였다. 전주를 거쳐 1911년 목포로 전임하여 남편은 전도 사역을 아내인 유애나 선교사는 정명학교 사역을 맡았다.
 
목사나 의사가 대부분인 선교사들 틈에서 유애나 선교사는 교사 자격증을 지닌 교육 전문 사역자였다. 한국어 능력과 함께 지적 능력이 뛰어났던 유 선교사는 교장으로서 정명학교의 교과 체계를 세우고 신축 건물을 세우는 등 학교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919년 학생들의 만세 시위와 관련하여 안타깝게도 몸을 크게 다쳐 이듬해 사망하였고, 광주 양림동에 누워 있다. 그녀가 사망 직전에 남긴 책, ‘Day In and Day Out in Korea(한국에서의 나날)’은 미남장로교 조선선교회 초기 4반세기를 잘 담고 있는 선교사가 직접 쓴 최초의 역사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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