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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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부터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대한 고백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구조인데, 기독교의 어떤 신앙고백도 다 이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도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시작하여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마치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본능은 ‘영생’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소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생은 그 뜻이 불로장생과는 전혀 다르다. 영생은 성도들이 죽은 후에 시작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이 맺어지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말한다.
이 점을 가장 잘 강조하고 있는 성경이 요한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한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죄 용서함’을 받은 일에서 이미 우리가 영생에 참여하는 일이 시작된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가 구원의 접촉점이라면, 구원의 완성(영화,榮華,롬8:30)의 두 사건이 부활과 영생이다. 따라서 부활과 영생 없이 영화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우리 믿는 성도 또한 지금 여기 삶의 터전에서 이미 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미 영생에 참여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이렇게 변증한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마지막 영화로운 모습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을 이루시는 사역에서 가능케 됨을 알려주고 있다.
부활과 영생에 대항 신앙고백은 두 개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는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에 대한 고백이다.
부활은 영생을 위한 부활이고 영생은 부활을 통한 영생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영생은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완성 행동에 의해 성취되는 창조의 완성이요 구원의 완성이 된다.
한 마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된 인간의 최종적 모습인 것이다.
이를 위하여 ‘죄 용서’가 있었고, 죄 용서를 위하여 성자의 구속 사역이 있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 중심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이유도, 곧 하나님 나라가 부활과 영생의 전체적 자평이기 때문이며, 부활과 영생을 하나님 나라의 개인적 구체화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함으로써 이미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성도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신자인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몸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썩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곳, 그 하늘(heaven)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면전(面前)에 있게 된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죽은 성도들의 영생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기쁘고 즐거우며, 이미 안식에 들어간 감사의 상태이다.
■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종말론적 신앙고백을 한다. 여기 몸은 ‘육체’를 가리키는 바 전인(全人)의 부활을 말한다.
오늘 날 교회가 부활 신앙을 변증할 때,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인데, 그 이유를 먼저 알고 넘어가는 것이 부활 신앙을 바로 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극복하는 두 가지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영혼불멸론으로 대부분의 자연종교와 헬라 철학과 거기에 기반을 둔 이원론적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 신앙이다.
영혼불멸론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체는 사멸적(死滅的)이나 영혼은 불멸적(不滅的)이라는 세계관이다. 이 영혼불멸론을 가장 체계화 시킨 자가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Platon,BC427-347)이다. 그의 사상은 헬라의 철학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원론적 인간론과 영혼불멸론을 떠나서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인간론이 설명되지 못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은 인간을 영혼과 몸의 이원론적 구성체로 보았으며, 죽음에서 영혼이 자신의 감옥이었던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히 자유로운 이상적 상태에 이른다고 보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육체를 스스로 만족하셨다.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는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죄악을 지칭한 것이지(마15:18-20), 육체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는다(갈5:16이하).
육체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죽음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말하며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 반면,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정적 운명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죽음 자체를 미화하지 않는다(롬6:23).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죽음 자체가 구원이며 영혼의 해방의 순간이 되므로 성경의 죽음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사도신경이 형성된 시기는 플라톤주의의 전성 시대였다. 플라톤주의의 설명을 떠나서는 어떠한 진리도 설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해도 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 안에 영혼불멸을 위한 어떠한 틈이나 배려도 허락지 않고 분명히 “육체의 부활”을 가르쳤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육체의 부활에 대한 약속과 그것이 기독교적 희망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설명할 때 철저하게 “육체 중심의 부활”사상을 관철해 나아갔다. 이 세상의 몸이 “썩어질 몸”이라면 부활의 몸은 “영적인 몸”이다. 여기에는 영혼불멸론이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전혀 없다. 인간은 단지 육체로만 설명될 뿐이다(고전15:35-54).
왜냐 하면 이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몸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을 말했지 영혼불멸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불멸론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모습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믿는 자를 부활로 이끄시는 하나님 안에서 성도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38절-39절에서 찬송한 바처럼, 현재나 장래나 우리 믿는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지 아니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롬4:17) 새 창조의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