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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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1년 6개월 만이다. 얼마나 그립고 기다려 온 사랑이던가!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오웬도, 레이놀즈도, 스트래퍼도 가 버리고 선교사라곤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남장로교 선교회는 목포를 버린 듯했다. 1901년 봄, 로티 사모가 갑작스레 죽은 후 유진 벨은 황망히 떠나 버렸다. 그리고 남은 이들도 하나 둘 가버리고 1902년 추운 겨울이 목포 교회 한국인 신자들의 마음과 몸을 죄어오던 그 때, 벨이 다시 왔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02년 12월 목포에 복귀했다. 혼자였다. 4,5년 전 복음의 불모지 목포를 처음 찾았을 때도 혼자였지만, 그래도 서울에 아내와 아들이 있었고 이내 목포에 같이 합류했지만, 이번엔 함께할 아내가 없다. 자녀들 헨리와 샬롯은 멀리 미국에 있는데, 그들을 놔두고 먼 태평양 건너 다시 목포를 찾았다.
처음 왔을 때 목포는 두렵고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이었는데, 이제 두 번째 온 목포는 비록 육신의 가족은 없어도 영적 가족들이 많이 있다. 어둠의 바닷가 초라한 어촌 마을에 불과했는데, 이젠 그를 반겨주고 감사의 눈물 흘리며 하늘 은혜 구하는 복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천사도 흠모하는 천국의 햇살이 빛나는 도시, 목포로 돌아온 유진 벨은 너무도 감격스러웠고, 참으로 감사가 넘쳤다.
그가 미국에 돌아가 지난 1년 반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내한 초기 6년여 동안 그리도 많은 편지를 써 남긴 까닭에 120여년 넘는 현재도 서울에서의 일과 목포 교회 초기 설립 시기의 그의 일상을 현미경 쳐다보듯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아내 로티의 사망은 그의 모든 걸 다 멈추게 하였고 더 이상 이렇다 할 기록을 만들지 않았다. 간간히 선교 보고서나 칼럼을 미셔너리 등에 남겼을 뿐, 더 이상 사사로운 어떤 글도 기록도 없음은 여러모로 아쉽다.
아내를 잃고 미국으로 돌아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지낸 세월이 참으로 간단치 않았으리라. 부모 형제들이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하였어도 그가 당했을 좌절과 안타까운 시선들은 무겁기만 하였으리라.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으랴, 무슨 은혜로 빈 여백을 메꾸었으랴. 세월의 약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새로운 힘과 용기 그를 에워 쌓았으리라. 목자없는 어린 양, 목포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벨을 움직였고, 그는 마침내 다시 목포를 찾아 왔다.
목포 교인들은 그를 반겼다. 참 그리운 얼굴이었다. 변창연, 김윤수, 지원근 등을 비롯한 백 여 명의 교인들은 애잔함과 감격이 교차했다. 1년 반 전의 벨과는 많이 다른 듯했다. 아픔이 그를 더 성숙하게 하였을까나. 보다 활기있고 어른스러운 그의 모습이 실로 듬직했다. 30대 중반을 달리는 유진 벨, 목포에서의 재기가 참으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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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세워진 목포 로티기념 예배당 |
다시 시작하는 목포 미션
가난과 궁핍, 죽임과 절망의 목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각별했다. 그의 은혜와 사랑, 섭리와 약속은 신실하셨고 변함이 없으셨다. 아니 오히려 더 풍성하여지고 촘촘하게 넓어지고 깊어져 갈 뿐이었다.
유진 벨은 열심을 내었다. 선교사나 목사없이 성도들로 지탱하던 교회, 목자없는 양떼들로만 힘겹게 일궈가던 목포를 우선은 추스르고 재구성하였다. 성도들을 심방하며 다시 모아들이고 흩어졌던 신심을 끌어 모아 예배와 소모임들을 다시 활성화하였다. 그리고 지원근 조사를 비롯한 일군들을 중심으로 목포 인근은 물론 멀리까지 전도대를 파송하며 복음을 확장하였다.
로티기념예배당 헌당
목포 교인들이 늘어나자 예배당을 새로 건립했다. 1903년 6월 28일, 이름을 ‘위더스푼기념예배당(Witherspoon Memorial Church)’이라 하여 하나님께 헌당하였다. 2년 전 먼저 하늘로 간 로티 사모를 추억하며 이름을 붙였다. 몸체는 사방이 벽돌로 된 서양식이지만 지붕은 기와를 얹은 한옥이기도 했다. 200명 수용이 가능한 교회의 건축비는 모두 2,500냥이었는데, 이중 80%는 김윤수를 비롯한 목포 교인들이 자체 부담하였다.
이 교회의 건축 비용 대부분은 전적으로 한국 그리스도인의 헌금으로 충당했다. 로티 벨 선교사를 기념하여 “위더스푼기념예배당”이라고 하였다. 목포 교인들은 많은 애정으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새 예배당은 벽돌 벽과 기와지붕으로 된 깨끗한 건축물이다. 사실상 모든 채무를 청산하고, 6월 마지막 주일에 헌당예배가 드려졌다.
이 예배에 열심있는 다수의 회중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은 수개월 동안의 기도와 노력의 결과에 기쁨과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설교 이외에도 맥쿠첸의 최초의 한국어 메시지가 있었다. 그것은 자발적인 참여와 자기부인의 헌신으로 이루어 낸 목포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업적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김(윤수) 집사가 목포 교인들의 일치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총 예산의 4/5를 어떻게 모금하였는가를 설명하였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한국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다. 새 예배당은 그의 지칠줄 모르는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또한 목포 지역에서 선교사역이 어떻게 번창해 왔는가를 설명하는 지원근의 열렬한 메시지가 있었다. 지원근은 현재 내륙에서 일하고 있는 사역자로서 목포 교회가 지원하는 한국인 전도자이다(유진 벨, 더 미셔너리 1903년 10월).
당시 목포 교회 대부분의 수세교인은 한 달 5불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벨 선교사는 이런 상황에서 그 많은 건축비를 감당하려 자신의 재산을 내어 교회당 건축에 힘쓴 목포 교인들의 헌신이 참으로 놀랍고 자기부정의 삶이었고 평가하였다. 당시 한국에서의 1냥은 미국 돈 1달라에 해당한다면서, 특히 상당한 개인적 헌신과 함께 모든 정성을 쏟아 교인들을 독려하고 지도해 낸 김윤수 집사는 가장 열정적인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높였다.
1냥은 하루 노동자의 임금이었다. 당시 음식점이나 여관에서 서너번 정도 식사를 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목포 교회 성인이건 어린아이건 돈을 아껴 조금씩 조금씩 건축 헌금에 정성을 모았다. 2냥 반을 헌금한 어린 여자 아이도 있었고, 가장 많은 헌금을 한 이는 200냥으로 김윤수 집사였다.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가고 물질적 헌신이 더해져 목포 교회는 성장하였다. 그리고 여러 전도자들과 조사 등의 외지 전도 활동도 날로 성과가 더해지고 선한 열매들이 쌓여갔다. 남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해남 우수영을 중심으로 한 화원반도 지역의 모임체가 활성화되었고, 영산강을 따라 올라가는 나주와 광주 일대의 전도와 공동체는 지원근 조사가 아예 상주하면서 교회를 일구고 있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다시 회복하여 유진 벨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은혜는 1903년 다시 시작하는 목포의 생명과 소망의 결실들로 이어져 갔다. 선교사들이 없을 때도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며 힘을 내었던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목포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면서 더욱 더 용기백배하였다. 목포는 물론 전라남도 전역으로 달려들며 복음을 전하고 씨를 뿌려 나갔다. 복음을 받아 들였던 목포 교회가 이젠 자립 자전하며 여타 지역에 내어 주는 일에까지 충성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하였고, 아예 전남 전역으로 가속화하기 위해 또 다른 일군들까지 준비시켰다. 태평양을 건너는 또 다른 이들이 목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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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07-06 10:5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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