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5. 하나님 주신 보물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1902년 3월, 오웬 부부와 스트래퍼 3명 선교사가 힘써 일하는 목포 교회에 레이놀즈가 합류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한국 선교에 복귀한 레이놀즈와 아내 팻시 볼링 부부는 목포 교회 담임 사역을 맡아 부임했다. 유진 벨과 오웬에 이은 목포 교회 3대 담임 목사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한국 교회의 보물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2천 여명에 이르는 외국 선교사들이 헌신하고 충성하면서, 140여년 가까운 역사 속에 우리 한국의 교회가 성장하고 생명의 은혜를 입었다. 숱한 이들의 귀한 사역과 열매가 많고, 그들을 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레이놀즈는 가히 한국 교회의 초석을 닦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우리말 성경을 번역하고, 장로교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서 한국장로교의 골격을 형성하고 정치와 신조 등 한국 장로교단의 뼈대를 갖추는 데 그의 역할은 지대했다.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이눌서, 1867~1951)는 1867년 12월 11일 버지니아주 노폭(Norfolk)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학업 성적이 탁월함은 물론, 라틴어, 헬라어, 불어, 독어 등 여러 어학 실력도 갖췄고, 스케이트, 테니스, 야구, 풋볼 등 각 종목마다 대표 선수를 할 만큼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미국 남부의 유명 사립 고등교육기관인 햄든시드니 대학과 미남장로교단의 신학교인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2년 11월 테이트, 전킨 등과 함께 7인의 선발대를 이루어 미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7년까지 45년을 한국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25살에 아내와 함께 와서 70세 정년에 이르도록 그의 청춘과 일생을 한국과 호남의 교회를 위해 바쳤다. 전주와 목포 교회 목회자로, 평양신학교 교수로, 그리고 성경 번역과 문서 사역 등 대한민국의 교회 성장과 발전에 단연 탁월하고도 훌륭한 사역을 펼쳤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수많은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길러졌고, 그 제자들에 의해 한국의 교회가 성장하며 발전하였다.



1931년 54살, 평양신학교 재직 당시의 레이놀즈


목포 교회 3대 담임, 레이놀즈

레이놀즈 목사는 오웬 부부, 스트래퍼와 함께 교회 목양 사역을 충실히 하였으며, 또한 지역 순회 전도하는 일과 성경 번역하는 일 등에 열심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팻시 볼링 역시 교회 사모로서 남편의 일을 도우며 자신도 스트래퍼 선교사와 함께 목포 여성 교인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충성하였다.
 
레이놀즈 부인(팻시 볼링)이 (목포에)온 이후로 내가 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예비 신자반이 따로 구성되었다. 시작할 때는 같이 하지만, 예비 신자반 교육은 다른 방에서 레이놀즈 여사가 지도하고 있다. 출석은 언제나 기대 이상이었다. 사실상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반에 나오고 있다(스트래퍼, 미셔너리, 1902년 7월). 

미남장로교 조선의 최초 선교사로 레이놀즈와 함께 하였던 팻시 볼링(Patsy Bolling, 1868~1962)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아멜리아 카운티(Amelia County)에서 태어났다. 볼링 양 역시 대학 시절부터 외국 선교에 마음이 있었고, 레이놀즈를 만나게 되어 결혼, 가정을 이뤄 한국에 함께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볼링 선교사는 친절하고 밝고 관대하고 원만한 성격이었다. 그녀의 좋은 성품은 한국 여인들의 호감을 샀고, 여러 사람을 상대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많은 여인들이 항상 그녀의 주변에 몰려 들었고, 볼링은 그들의 인생 상담자가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그녀는 헌신된 아내와 주부로서 남편의 충실한 반려자요 동역자였다. 동시에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 누구든지 언제나 방문할 수 있게 했으며, 그들이 잘 쉴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며 교회 사모로서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다.

레이놀즈 부부가 목포 교회에서 사역한 지 세 달 째 되는 6월 11일,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한국 감리교 창시자 아펜젤러가 레이놀즈를 찾아 목포에 오던 중 선박 사고로 그만 사망하였다. 한국어성경번역위원들이 목포에서 독회(讀會) 모임을 하기로 하여 언더우드와 게일은 먼저 출발하여 도착하였는데, 아펜젤러는 사정이 있어 혼자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가 탄 일본 기선 558톤급 구마가와마루 배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를 지나던 밤 10시 무렵, 반대편에서 마주 오던 같은 일본 오사카 상선회사 소속의 675톤급 기소가와마루 배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 사고로 배는 기울어져 가라앉았고, 1등 선실에 있었던 자들은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음에도 아펜젤러는 자기 조사 조한규와 고향 목포로 돌아가던 정신여학교 여학생을 구하려다 그만 수장되고 말았다.

함께 배에 승선했다가 살아난 평북 운산의 광산업자였던 미국인 보울비(Bowlby, J. F.)의 증언으로는 수영도 잘하는 아펜젤러가 얼마든지 자신의 생명을 먼저 챙겼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조선인 동역자와 학생의 생명을 염려하는 그의 정신과 의지에 반하여 안타깝게 모두 사망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언더우드와 스크랜턴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게 되고, 아펜젤러도 사망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다급해졌다. 번역 사업의 진척을 위해 레이놀즈로 하여금 전적으로 번역 일에만 몰두하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미국과 영국 성서공회는 레이놀즈를 전임 번역자로 고용하였고, 그를 서울로 불러들여 번역 일만 하도록 요구하였다. 결국 레이놀즈는 1892년 9월 목포를 떠나 서울로 옮겼고, 성경번역에 집중하였다.

목포 교회도 중요했지만, 한국 교회를 위한 한국어 성경이 더 긴요했다. 그의 열심과 노력이 박차를 가하였고, 뒤이은 번역 위원들의 수고가 함께 합쳐져 1910년 드디어 신구약 완역이 이뤄졌다. 이듬해 1911년 우리나라 최초 신구약 한글 성경이 출판되었다.

이후 한글성경은 여러번 개역과 재번역, 여러 버전으로 발전하며 보다 좋고 훌륭한 한국어성경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데, 백여년이 훨씬 지금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맞춤법만 조금 바뀌었을 뿐, 여전히 레이놀즈가 번역한 성경을 읽고 있으니 한국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레이놀즈를 기억하며 감사해야 할 것이로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