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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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란 근원적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받은 성도들을 불러 교회로 연합함으로써 생명적으로 교제하며 주님을 닮도록 이끄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5).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 6:17),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하는 내용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 자신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회를 이루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양한 은사들을 각 지체들에게 다양하게 주어진다는 그 생명적 사귐을 믿는 것이다. 이어서 “죄를 용서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구원에 감격하여 순수한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특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골로새서 1장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는 사도 바울의 변증은 “그 아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속량(贖良, 아폴뤼트로시스, απολυτρωσις)’, 곧 죄 사함을 얻었다”는 뜻이며, 이는 구약 성경의 배경을 가진 언어이다. 즉 ‘속량’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420년 간 이짚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때 사용했던 단어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는 말씀이 곧 속량이다. AD.418년 카르타고 공의회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354-430)의 영향을 받아 “우리 죄를 용서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지상의 ‘교회’가 죄 사함을 받는 자들의 모임일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공동체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란 끊임없이 죄 사함이 일어나는 공동체라는 의미가 가능하다. 달리 표현하면 “교회란 죄인들이 모인 거룩한 공동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여 있을 때 누리게 되는 큰 유익의 하나는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에 있다. 교부 시대 이후, 참된 교회는 항상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사죄의 은총을 고백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이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주로 오시기까지 이어질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먼저 자기 자신의 ‘과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항상 스스로 물어야 한다. 사죄의 은총을 받은 이는 먼저 죄를 죄로 여긴다.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진정 용서를 받았다라고 할 수 없다. 죄란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우주적인 반역 행위이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는 그분을 보좌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내’가 올라앉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여 자기 뜻대로 행하려는 징벌적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죄 용서, 이 둘은 불가불리(不可不離)의 관계이다. 진정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만이 죄를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 심각하게 여긴다. 죄는 하나님의 존엄과 엄위에 대한 침해요, 그의 법에 대한 고의적 침해라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죄를 제대로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죄는 참으로 심각하기 그지 없다. 그러함에도 인간이 범한 그토록 엄청난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로 덮으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 이 사죄(赦罪)가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복음(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이라는 칭의의 교리가 그래서 중요하다. 세상의 절대 권력을 남용하여 한 가정을 폐망(廢亡)시킨 다윗 왕의 완전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간과하지 않으시고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찾아가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와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삼하 12장, 시편 51편). 그러므로 본 사건의 중심 인물은 참회하는 다윗이 아니라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자복한다. 이 한탄은 다윗이 밧세바와 부정(不淨)을 저지르고 그의 남편 우리야 장군의 죽음을 교사(敎唆)한 악행을 범했으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깊이 자각하고 통절히 참회하고 있다(삼하 12:13).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소서”(시 51:5-6).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죄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죄가 하나님을 거스른 행위라는 사실을 통렬히 참회하면서 자신의 죄의 뿌리가 출생 이전부터 뼛속 깊이까지 박혀 있음을 탄식하며 소멸해 주실 것을 청원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위임 받은 권력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에게 무서운 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죄를 가중시켰다(삼하 11장). 그러나 선지자 나단의 예리한 송곳 같은 죄악의 지적과 책망에 그는 즉시 회개의 자리에 고꾸라졌다. 여기서 다윗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현실적인 자존심이나 어떤 고통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자신이 저지른 엄청 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실까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다. 부도덕한 사회일수록 죄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징계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와는 판이하게 다른 점에서 다윗의 훌륭함을 보게 된다. 그렇게 참 회개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다시 맡기신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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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06-09 11: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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