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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벨이 떠난 목포는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갑작스런 아내 로티와의 사별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했다. 군산에서 아내가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은 이후,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하루 하루를 건너 왔다. 목포로 와서 아내의 시신을 동료들 도움으로 서울로 옮겨 장사를 지내고 양화진에 묻은 후, 다시 목포에 와 철 없는 아이들을 챙기고 짐을 꾸려 고국으로 돌아서는 유진 벨. 그 자신도 힘들었을테고, 이를 지켜 보며 돌려 보내야 하는 오웬 부부와 스트래퍼도, 목포 교인들도 슬프고 안타까웠다.

아내를 불시에 잃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유진 벨을 대하면서 목포 교회와 교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와 자세는 세상적 이해나 기준이 아니리라.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보배롭고 존귀하다 하신 인생을 어리석은 우리의 이해와 세속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마음을 기울여야 하리라. 죄 없으신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 나가는 게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허망하게 보일지 모르나, 우린 그의 죽음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과 영원한 자녀 됨의 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다.

유진 벨은 떠나면서 오웬의 손을 붙잡으며 목포 교회를 부탁하고 당부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젊음을 드려 낳았던 영적 자녀들인 교인들을 대하며, 이제는 오웬 목사를 따라 하늘 충성된 신자로 살도록 부탁하였을 것이다. 4월 말 조선을 떠나 5월 1일 일본 고베 도착하여 그곳에서 카메론 존슨을 만나고 이후 미국 고향 켄터키로 돌아간 벨 선교사. 부모 형제를 6년 만에 대하며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고 회복의 시간을 조용히 가졌을 터이다.

위로와 회복의 하나님께서 유진 벨과 어린 자녀들에게 함께 하셨듯이, 그가 떠난 목포 교회 역시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교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내었고, 오웬 목사의 지도를 따라 더욱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1901~1902년 당시의 목포교회 성도들

(뒷줄 가운데 중절모 쓴 오웬 목사, 왼쪽에서 4번째 상투를 자르고 망건을 벗은 김윤수 집사)




목포 교회 2대 담임, 오웬

벨은 1901년 4월 하순 목포를 떠났다. 벨의 공백을 오웬이 대신하였다. 그해 5월부터 이듬해 1902년 3월 레이놀즈가 안식년 마치고 돌아와 목포교회를 맡기까지 10여개월을 담임 사역하였다. 그리고 레이놀즈가 목포교회 교역을 잇게 되어 오웬은 4개월 더 지난 7월에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갔다.

그런데 지금까지 오웬 선교사의 담임 사역을 대체로 인정하지 않고 레이놀즈만을 유진 벨에 이은 목포 담임교역자로 알고 있다. 몇 기록에는 1901년 벨이 떠난 이후에 오웬도 곧바로 미국에 간 것으로 전해졌기에 그러는 지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오웬도 분명 신학을 전공한 목사이기도 한데 단순히 의사로만 여겼던 이해 부족 탓도 있다.

그러나 1901년 오웬은 미국에 가지 않고 목포에 있었다. 오웬 부부가 남긴 편지 등에는 목포에서 활동한 기록이 몇 개 있는 반면, 그가 미국을 다녀온 기록이나 근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간격이 너무 짧아서 만약 미국에 갔다면 모처럼 가는 고향을 그리도 빨리 다녀왔을까, 싶다. 더하여서 목포 교회에 이제 벨이 없고 목사라곤 자기 혼자일 뿐인데, 우리가 아는 오웬의 성품이나 기질상 그가 자기 건강을 내세워 미국까지 치료하러 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아내 휘팅은 이미 임신 중이어서 미국까지 다녀야 하는 것도 가늠하기 어렵다.
 
남편은 내일의 예배를 준비하느라 밤 늦게까지 앉아 있다(휘팅, 1901년 8월 10일).

오웬이 남긴 편지 기록으로 과연 그가 1901년 미국에 간 적이 있는 지, 그렇지 않은 지 그의 알리바이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기록한 편지는 현재 50여통 전해져 오는데, 1901년에는 모두 세 통으로, 5월 16일, 8월 10일, 12월 2일에 기록한 것이다. 5월에 쓴 편지는 이틀 전인 14일, 서울 민노아 선교사택에서 열린 불과 앨비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길에 제물포에서 쓴 것이고, 8월 편지는 아내 휘팅이 목포에서 쓴 것으로 주일 예배를 앞두고 토요일 늦게까지 남편 오웬이 설교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며, 12월 글은 오웬이 목포에서 쓴 것으로 지방 순회 사역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1901년 아내 휘팅은 임산부로서 10월 3일 목포에서 첫 딸 메리를 출산하였다. 그리고 12월 편지에 의하면, 오웬은 11월에 열흘 간 광주 지역을 찾아가 이곳에서 전도하고 예배도 하고 20명에 대한 문답도 하였다. 그리고 나주에서는 두 노인을 전도하여 결신하기도 하였다.

12월에 오웬은 선교연례회의에 참여하였다. 14일부터 5일간 군산에서 열린 9차 미팅에서는 유진 벨의 공백으로 목포 스테이션의 인력 충원 문제를 논의했고, 레이놀즈가 안식년에서 돌아오면 목포 사역을 맡기기로 했으며, 광주 일대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으니 장차 광주에 새로 선교부를 설치하자고 잠정 결론을 짓기도 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이 정리한 역사를 기초로 여러 학자들이 1901년 오웬도 미국에 갔다고 하는 데 한결같이 아무런 근거도 구체적인 내용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여러 내용을 살필 때 그가 미국에 간 적이 없다고 본다. 그는 목포 교회를 이끌고 예배와 설교하였고, 주중에는 조사 등을 앞세워 광주 나주 등지에 그리고 해남 등지에까지 열심히 순회 사역도 펼쳤다.

오웬 선교사는 1902년 여름에 안식년으로 미국엘 가서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주로 지냈고, 1년 지나 1903년 10월에 다시 목포로 복귀했다. 이게 팩트다. 니스벳도 브라운도 오랜 후에 과거의 일을 기억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착각하여 1901년 안식년 다녀온 것으로 잘못 기록하였다고 본다.

오웬 선교사에 대한 여러 연구 중 1901년 안식년 다녀온 기록은 잘못된 것이며, 그는 1902년 7월에야 처음 미국으로 1년 이상 다녀왔다. 따라서 목포교회는 1901년 담임으로 사역한 오웬을 마땅히 2대 담임 목사로 고쳐야 한다. 그는 벨의 공백을 훌륭히 메웠다. 목포 초기 교회들이 오웬의 사역과 평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뒤늦게 1902년 3월부터 이은 레이놀즈 선교사를 2대 목사로 알아 오고 있다. 이제라도 레이놀즈 이전 시기에 오웬이 훌륭히 담임 사역을 대신하였으니, 마땅히 오웬을 목포교회 2대 담임교역자로 추대해야 옳을 일이다.

의사이지만 또한 목사로서 아주 성실하게 목포 교회 목양 사역한 것을 기려 오웬을 2대 목사로 고치면 좋겠다. 1901년 4월 말 이후 1902년 3월까지 1년 가까이 실제적으로 담임 사역한 것을 평가하여 2대 담임으로 하고, 1902년 3월 이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레이놀즈 선교사를 3대 담임으로 수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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