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죽기 전에 친필 유서를 썼습니다. 유서의 내용은 “모든 분들에게 미안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 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전 주간조선이라는 잡지에서 “앞으로 귀하가 살 수 있는 시간이 24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일을 꼭 하고 싶으십니까?”라는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문에 3,841명이 응답하였습니다. 분석 내용은 이렇습니다.(2001년 3월 29일 주간조선 1646호)
① 임종을 알리고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주변을 정리한다. 894 (23%) ② 가족에게 편지 혹은 유서를 쓴다. 815 (21%) ③ 고향이나 추억의 장소를 찾아 여행한다. 449 (11%) ④ 사랑하는 사람(혹은 첫사랑)을 만난다. 446 (11%) ⑤ 기도를 하거나 종교에 귀의한다. 310 (8%) ⑥ 부모님이 안 계실 경우, 묘소를 찾아 인사를 한다. 308 (8%) ⑦ 마음의 빚을 정리하거나 미워했던 사람과 화해한다. 292 (7%) ⑧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쓴다. 163 (4%) ⑨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65 (1%) ⑩ 혼자 죽기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고를 저지른다. 63 (1%) ⑪ 기타 36(0%)
우리는 단 한 번의 삶을 삽니다. D.H. 로렌스(Lawrence)는 ‘사람이 두 번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첫 번째에서는 실수를 하고… 두 번째에서는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볼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리허설(예행연습)’이 없습니다. 우리는 곧장 무대 위로 올라갑니다. 역사의 지평선 위에 등장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라져 갑니다.
톨스토이는 대 문호답게 삶의 허무를 안고 몸부림치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예 자살해 버릴까? 아니다. 자살을 하기 엔 난 용기가 없다. 그러면 죽음이 올 때까지 군말 없이 견딜까? 그것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산단 말인가? 죽기 위해서 산단 말인가? 끝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질문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어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똑같은 질문이 나를 괴롭힌다. 드러누워 눈을 감아 보지만 더 괴로울 뿐이다.”
이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처럼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다가 지쳐 쓰러져 있는지 모릅니다.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은 절대 이와 같은 생의 허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을 찾은 사람들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호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 우리의 삶은 희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새 생명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맘껏 예수님을 높이며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 찬 한 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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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05-19 11:05: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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