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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Credo), “나는 믿습니다” Ⅺ - 이성재 목사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에서 이제는 ‘그분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성도의 신분과 특성에 대한 고백’으로 선회한다. 먼저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Spirit)과 교회(Church)는 불가불리(不可不離)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교회(敎會)’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불러냄을 받은)’는 원래 그리스 사회에서 이 단어를 정치적 집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었었다. 사도행전 19장 39절에 ‘에클레시아’가 민회(民會)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그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이처럼 법에 따라 소집된 시민의 모임, 혹은 회집을 의미했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곧 교회”로 새로운 종교적 의미로 통용되게 된 것은 성령 안에서이다. 언필칭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함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기에 교회(에클레시아)를 ‘그리스도의 교회(Ecclesia Christi), 하나님의 교회’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구상이며,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친히 세우셨다. 따라서 성령이 떠난 교회는 교회일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 역시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이 세우거나 개척하거나 운영하거나 유지해 나가는 기관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신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교회를 거룩하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하나의(Unitika) 교회, 거룩한(Sancta) 교회, 보편적(Katholikes) 교회, 사도적(Apostolika)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지상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서 교회의 속성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이라고 정의하였고, 또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이며, 사도들에 의해 설립되고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고전 3:6). 그러므로 교회의 시작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에게서 났다(1:36). 따라서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을 향함이며(3:21-2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10:31) 신앙 공동체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교회는 인종과 국경과 문화와 신분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하나됨’(연합)을 추구한다(요 17:21). 이와 같이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복음을 인정하는 곳에는 항상 하나인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을 올바로 전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이신칭의 교리를 가르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진리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신 날 밤, 성부께 드린 기도이다. 이 기도는 오직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청원으로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b)라는 간구임과 동시에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해 주시라는 간절한 기도이다. 원래 ‘거룩한 교회’라는 표현은 이미 신약 성경에 언급되었다(고전 14:33; 엡 5:27; 벧전 2:5,9). 그런데 사도신경은 ‘단수’(單數, The Singular Number) ‘내’가 아닌 ‘복수’(複數, The Plural Number) ‘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다중(多衆)의 모임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다중의 모임 공동체가 ‘하나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교회(요 17:20-23) 이기에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거룩성’을 칭의와 사죄의 은혜로부터 성립되었다고 일관되게 이해하였다. 즉 교회가 거룩한 것은 죄인이었던 인간이 성령으로 죄 사함 받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이지 인간 자신의 수양이나 경건의 노력으로 중생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루터는 항상 ‘교회의 거룩성’을 능동적(Sacred Active)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주동적 결단’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수동적(Sacred Passive) 은혜로 이해하였다. 장 칼뱅도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에베소서 5장 25-27절을 석의하면서 “거룩한 교회란 죄 사함을 통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거룩하게 다듬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를 말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통해 나날이 성화(聖化)되어져가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라고 정의함으로써 교회와 거룩함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진 관계로 진술하면서, 그 핵심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임을 변증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거나 유지될 수 있는 공동체는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약속하시고 이루시는 대로,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시는 공동체이기에 ‘거룩한 공교회’라 일컫는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지체(肢體)들이 특별히 거룩하고 무죄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신앙적, 사회적 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에 의해 구원의 서정으로서 인격의 죄상을 자르고(절, 切), 갈고(차, 磋), 쪼아내 다듬고(탁, 琢). 문질러(마, 磨) 빛을 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거룩한 무리, 곧 성도(聖徒)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무리’의 모임이 곧 ‘공교회’이며, ‘공교회’는 그래서 본질상 이중적 움직임으로 존재의 가치가 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교회의 지체로서 매우 수동적으로 성령께서 움직이게 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하는 내적 변화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증인으로 당당히 땅을 밟고 일어나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도적으로 전파하는 용기 있는 외적 확장의 움직임이다. 이 사명을 맡은 우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복음 메세지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복음에 맞춰 변화시키는 것이다(롬 12:2). 그러므로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근거는 현재의 교회가 도덕적, 윤리적 완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성령의 치열한 사역으로 교회 본연의 속성과 특성을 드러내는 생명력 넘치는 교회로 세움받은 공동체가 참 교회이며, 이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야말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거룩한 자들의 교통”(Communio Sanctorum)으로 선순환 된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의 교제(교통)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에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4-5)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의 지체로서의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 Fellowship)가 유기적(Organic)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에 참여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즉 동일한 화해, 구속, 침의, 성화, 생명, 구원 등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기에 우리 성도 또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유익을 유기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교제(Fellowship)의 의미를 인식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성경적 삶의 확증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지체 안에 내주하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성도의 삶이 성경적 삶이다(요 15:4,5; 고전 12:13; 롬 8:9; 고전 6:17).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들을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나의 구원과 각 지체들의 상호 구원의 온전함을 위하여 상합하고 헌신할 의무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내용은 모든 성도가 성령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에서 교회와 세상을 섬기기 위한 다양한 은사들이 각 지체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는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이 고백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 왔을까? (옛)“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즉 “거룩한 교회”와 “성도”, 이 둘이 서로 교통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가! 그러나 라틴어 사도신경의 교회 고백 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믿는다”(상크탐 에클레시암 카톨리캄,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뒤에 “성도의 교제”(상크토룸 콤뮤니오넴, Sanctorum Communionem)가 덧붙여져 있음을 본다. 그런데 여기 Sanctorum Communio의 해석이 교회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는, ‘성도의 교제’에서 (‘성도’, 영어에서라면 saint) ‘성도(聖徒)’를 ‘성인(聖人)’, ‘성자(聖子)’로 보는 로마가톨릭교회는 “땅에 있는 성도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도들의 교제”로 이해하여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을 “성인들의 통공(通功)을 믿습니다” 즉 “땅에 있는 성도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인들과의 교제”라고 믿는 것이다. 교회 내 계급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무리한 주장(고백이 아닌)이다. 둘째는, ‘성도의 교제’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한 ‘성도’로서 상호 간의 교제가 있다는 단순한 입장이다. 현재 ‘성도의 교제’를 ‘사람의 사귐’으로 이해하는 세속적 풍토가 교회를 어지럽힌다. 셋째는, ‘성도와 성인 간의 교제’, ‘성도와 성도 간의 교제’가 아닌 ‘거룩한 것과의 교제’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예배의 특징인 ‘거룩한 것’, 곧 그리스도의 피(포도주)와 살(빵)을 나누는 성찬의 의미를 항상 예배와 삶에 살리며 그 신비의 사귐으로 연합을 이루는 삶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제(코이노니아) 곧 “그리스도께 접붙임 바 되는 생명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사에서 “상크토룸 콤뮤니오의 핵심은” ‘거룩함과의 교제’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고백할 때, 교회는 소금처럼 맛깔스럽고, 십자가처럼 온 세상을 빛낼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확신 있게 고백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삶으로 빚어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 한 몸 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 되어 /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찬송가 220장 3절).


* 지난 제 293호 크레도 Ⅹ는 Ⅸ로 바로 잡습니다(글쓴이).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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