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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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4월 12일 로티의 사망은 너무도 충격이었다.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녀의 사인은 심장병으로 알려졌다. 믿는 이들이 늘어가고 세례자는 물론 교회 일군들도 한층 자라가며,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선교사로서 결실과 보람을 한층 더해가는 중인데, 이 무슨 일인가? 이제 겨우 34살 한창 젊은 나이인데, 아내의 찬 시신 앞에서 유진 벨은 참으로 망연자실하며 무척 혼돈스러웠으리라. 동역자 오웬도 가정을 이루어 휘팅 의사도 합류하였고, 이제 스트래퍼 등과 함께 제대로 된 팀을 이루어 더더욱 목포와 전남의 선교를 꿈꾸던 벨 선교사로서는 참으로 감당키 힘든 아픔이었다.
며칠 전 새 봄이 되어 전라북도 전주까지 찾아 다니며 유진 벨은 출장을 다녔다. 1900년 9월 10일 제물포에서 열린 9차 연례회의에서 오웬이 의장에, 그리고 벨은 서기 임무를 맡았다. 선교회 서기로서 전주와 군산 스테이션 등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나선 길이었다.
4월 9일 헨리와 샬롯, 아이들을 안아주고 아내 로티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목포를 떠나 전주로 향했는데, 그게 살아 생전의 마지막이었다. 멀리 출장을 가도록 열심히 선교회 일을 감당하는 남편 벨의 뒷 모습이 로티에겐 얼마나 멋져 보였을 것인가.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도 잠깐이었을 뿐, 로티는 벨이 떠난 지 얼마 안되어 갑작스런 심장 이상으로 의사 오웬과 휘팅이 제대로 손 써볼 틈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맡겨진 일에 더더욱 하늘 은혜 구하며 열심히 전주로 달려가 선교회 업무를 살피던 벨은 11일 아내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아야 했다. 벨은 긴급히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 게 빠르겠다고 판단하여 군산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12일 군산에 도착했더니 그곳 선교부로 날아온 전보에는 아내가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벨은 그로부터 4일이나 지나 16일에 목포 도착하여 이젠 말없이 가만히 잠들어 있는 아내 로티를 대하여야 했다.
이제 갓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동시에 미지의 이국땅까지 와서 충성하는 선교사들에게 헌신만큼이나 가족을 잃어야 하는 아픔은 많았다. 내한 2년 차인 1893년 여름, 레이놀즈 부부는 북한산 사찰에서 첫 아들 윌리엄(William Jr.)을 출산하였는데, 아이는 전염병에 노출되어 10일 만에 죽고 말았고 서울 양화진에 장사 지냈다.
전킨 부부도 아기를 일찍 잃었다. 첫째 조지(George Garnett)가 1893년 태어났는데, 그 다음해 1894년 사망하였다. 둘째와 셋째는 잘 자랐으나, 넷째 시드니(Sidney Morland)도 1899년 출생한 지 두 달 만에, 그리고 다섯째 프란시스(Francis Wood)는 1903년 4월, 출생 20일 만에 죽었다. 8명의 자녀를 낳았던 전킨 부부는 3아들은 모두 풍토병에 걸려 너무도 일찍 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전킨 선교사 자신도 1908년 1월 2일 43세의 젊은 나이에 순직하였다. 전킨과 아들 시드니와 프란시스는 군산 스테이션에 묻혔고, 장남 조지는 양화진에 묻혔다. 현 전주 예수병원 맞은 편에 있는 선교사 묘원에 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전킨과 세 자녀의 묘는 가묘일 것이다.
잠자는 자들의 성지
유진 벨은 아내 로티를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장사지냈다. 서울 합정동 양화진은 조선시대부터 한강변의 유명한 나루터 중 하나였다. 이곳 묘원에는 현재 400여명이 넘는 외국인과 145명의 선교사 가족들이 누워있다. 1890년 7월 28일 헤론 선교사를 이곳에 장사지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헤론(Heron, John W, 1856~1890)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임명된 기독교 선교사였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테네시에서 자라며 의과대학을 마치고 의사로서 조선에 선교를 미북장로교에 지원하였다. 알렌과 언더우드가 내한하기 이전인 1884년 4월 28일, 미북장로교는 그에게 조선으로 파송 명령을 하였다.
헤론은 뉴욕에서 임상 훈련을 더 쌓고 약혼녀와 결혼도 하느라 다른 이보다는 뒤늦게 내한하였다. 알렌에 이어 제중원 2대 원장으로 의료 사업에 충실하였으며, 성경번역과 전도 활동 등에도 힘을 기울였다. 1890년 여름 무리하게 진행한 순회 진료 여행으로 과로와 이질에 걸려 그만 별세하였다.
조선 최초 파송명령을 받은 선교사이면서 동시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사망하고 말았다. 조선의 교회와 기독교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헤론 선교사,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를 매장할 장소를 조선 정부와 의논 끝에 양화진을 얻게 되었고, 그 이후 계속해서 이 땅에서 밀알이 되었던 숭고한 죽음들이 누워있게 되었다.
벨 여사의 죽음
내가 처음으로 벨 가족을 만난 것은 1895년 봄이었다. 그들은 일본을 경유해 한국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벨은 목포에 새 선교부를 열었으며, 그곳에 아름다운 작은 집을 지었는데, 그것은 내가 한국에서 본 가장 “애정이 넘치고” 즐거운 가정의 하나였다. 나는 1899년 그곳을 방문하여 벨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바 있다.
유진 벨은 즉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미국에 있는 고향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고, 모든 일정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진행시켰다. 그들은 어제(5월 1일) 고베에 도착했다. 마침 미국으로 연결되는 배를 놓쳤기 때문에, 감사하게도 나는 우리 집에서 지난 밤을 그들 가족과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귀한 기회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기 위해 오늘 아침 일찍 기차로 요코하마를 향해 출발했다(카메론 존슨, 1901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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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진(합정역) 선교사 묘역에 있는 로티 벨 묘 |
유진 벨은 아내를 양화진에 묻고 목포로 돌아 왔다. 엄마가 어떻게 되었는 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는 아들 헨리와 딸 샬롯. 헨리는 5살이었고, 샬롯은 이제 겨우 두 살이었다. 너무도 막막하고 도무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아내를 잃은 벨은 일단 엄마를 잃은 아이들과 함께 미국의 부모님 곁으로 가야 했다.
내한한 지 7년째라서 올해는 안식년으로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려니 하고 아내와 함께 마음을 다지고 있었는데, 그의 귀국길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걸음이 되었다. 목포 교회의 일을 오웬과 스트래퍼에게 맡기고, 목포 항을 떠날 때 목포 교회의 신자들이 모두 나와 함께 슬퍼하며 이별의 눈물을 흘렸다. 아내와 함께 건너왔던 태평양을 이제는 그녀 대신 어린 아이들과 함께 다시 거슬러 돌아가는 유진 벨을 위로하며 그의 슬픔을 함께 하였다.
자신의 영화가 아닌 하늘의 꿈을 좇아 젊은 나이에 먼 이국 땅 찾아 열심부렸는데, 결국 그 댓가와 결과가 이런거냐고 어떤 사람들은 비웃으며 값싼 동정만 읊어댈런 지 모른다. 어찌 그의 열심과 한 여인의 젊은 죽음을 하늘이 무심히 팽개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은 경건한 성도의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신다(시 116:15)” 하였음을 목포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하리라. 하나님의 섭리 각별하여 그의 은혜 이 땅에 충만하여 유진 벨의 인생에 목포 교회 위에 새롭게 솟아 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