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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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티는 하숙생 오웬과 한 집에서 지내는 게 참 거북했다. 같은 미혼인 스트래퍼는 여성인 반면 오웬은 남성 총각이라 로티는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1900년 목포 교회가 첫 세례도 행하고 성장하며 은혜의 길을 달렸을 때, 다른 한편으로 벨 부부에겐 오웬이 늘 맘에 걸렸다. 유진 벨 부부와 오웬은 여러모로 차이가 많았다. 오웬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스코틀랜드까지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출신 가정환경이나 학력은 물론, 미국의 남북간 이해의 차이와 더불어 정치, 사회적 성향도 차이가 컸다.
특히 로티 사모는 33살 동갑내기지만, 노총각 오웬 목사를 대하는 게 더 어려웠다. 베리 하우스에서 같이 지낼 때도 그랬고, 근처에 따로 오웬이 집을 지어 거주는 달리 했을지라도, 여전히 하루 삼시세끼 식사는 로티가 챙겨줘야 했다. 하숙생 오웬에 대해서 꼬박 꼬박 하숙비를 챙겨 받았을지라도 나이든 총각의 밥시중을 계속 하는 건 곤란한 문제였다.
로티는 남편 벨을 충동하여 오웬을 장가 보내기로 하였다. 당장 떠오르는 처녀가 휘팅이었다. 미 북장로교 의사 선교사로 서울에 있었던 휘팅은, 벨 부부가 5년 전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면서 같은 배를 타고 함께 입국한 내한 동기여서 그동안도 잘 알고 지내 왔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오웬보다 두 살 아래인 31살로 내한 선교사로 6년차이면서도 아직 미혼이었다.
벨 선교사는 군산의 드루 선교사와 함께 오웬 장가 보내기 공작을 꾸몄다. 1900년 여름 휴가 시즌을 맞아 목포의 오웬과 서울의 휘팅을 군산으로 불러 들였다. 무더운 여름을 바닷가 항구에서 지내며 휴가를 보내고 여럿이 같이 교제하며 쉼을 누릴 때 군산의 큐피드 화살은 오웬과 휘팅에게 제대로 꽃혔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12일 서울 언더우드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선의 선교 역사에서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사 간에 이뤄진 최초의 커플이었다. 남부 버지니아 출신의 오웬과 북부 메사추세츠 출신의 휘팅이 합을 이뤘다.
1세기 이전 미국 사회와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 시대는 미국 여성들이 결혼하기가 어려웠다. 1860년대 발발한 미국 남북전쟁은 많은 재산상의 피해와 더불어 인명 피해도 컸다. 노예제 문제로 시작된 미국 내 4년 동안의 내전으로 사상자만 100만명을 넘겼다. 많은 젊은 남성들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이는 심각한 문제를 양산했다.
전쟁의 후유증은 특히 결혼 성비의 불균형으로 가정과 사회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결혼을 하고 싶어도 상대적으로 남성들이 너무 없어서 적령기의 여성들이 결혼을 못하거나 늦어지거나 더하여 비이상적으로 결혼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비단 미국 내에서만 아니라 해외 선교사들의 결혼 양상도 독특한 점들이 많았다.
미남장로교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 온 린니 데이비스 선교사도 미국에 있을 때 혼기를 넘겨 결혼을 못한 상태에서 1892년 내한 선교사로 왔고, 30살 노처녀였다. 그녀는 6년이 지나 36살 되던 1898년 후배 선교사 해리슨과 결혼할 수 있었는데, 신랑은 4살이나 연하였다. 성비의 불균형은 여성들이 남자가 없어 이처럼 연하의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최초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후배 선교사 릴리아스와 1889년 결혼했다. 신부 릴리아스는 38살 노처녀로 8살 연하의 총각 언더우드와 가정을 이뤘다. 신랑이 8살 연하인 경우는 20년 후 목포에서도 일어났다. 신안 등 전라남도 섬 일대를 중심으로 사역하였던 맥칼리 부부 선교사는 1909년 목포에서 결혼하였다. 신부 에밀리 코델은 36세였고, 신랑 맥컬리는 28세로 8년이나 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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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결혼한 언더우드 부부, 신부는 38살 노처녀 릴리어스 선교사로
8살 연하의 총각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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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꽃피는 큐피드 항구
앞서 얘기한 해리슨과 린니 데이비스 결혼도 신부가 4살이나 더 많았다. 해리슨이 1886년 내한하였을 때 미남장로교 선교사는 모두 12명이었다. 8명은 기혼 부부였고, 4명의 미혼자는 해리슨과 루이스 테이트 두 총각과 데이비스와 매티 테이트 두 처녀였다. 사랑의 화살이 열심히도 돌아다녔을 텐데, 전주에서 사역하는 두 명의 데이트는 남매였고, 전주의 총각 해리슨이 군산의 아가씨 데이비스에게 다가가 사랑의 결실을 이뤘다. 미남장로교 선교회 내에서 이뤄진 최초 커플이었다.
군산의 노처녀 데이비스가 좀 늦었지만 사랑의 결실을 이뤘듯이, 군산이라는 항구 도시는 선교사들에게 참으로 사랑의 결실이 이뤄지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남녀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큐피드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공간이 군산이었다. 1898년 해리슨과 데이비스에 이어 군산에서 두 번째로 사랑이 꽃을 피운 건 2년 지난 1900년 오웬과 휘팅이었다. 그리고 1년 후 1901년엔 군산에서 불 선교사의 로맨스가 결실을 이뤘고, 1904년에는 군산에 와 있던 마가렛 휘태커 양이 유진 벨과 결합하는 일이 벌어졌다.
총각 윌리엄 불 목사는 1899년 군산에 도착하여 사역하였다. 이듬해엔 앨비 양이 내한하였는데, 린니 데이비스양이 시집가느라 전주로 가버린 탓에 공백이었던 군산의 여성 사역을 맡아 군산에 부임하였다. 군산의 큐피드가 이들 미혼 젊은이들을 가만 놔두지 못했다. 군산에서 각자 열심히 미션에 충성하는 한편으로 사랑의 결실이 신속히도 이뤄져 앨비 양이 군산에 온 지 1년도 안되서 1901년 5월에 서울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신부 앨비 양은 32살, 신랑 불 군은 25살 7년 연하였다.
1904년에도 미남장로교 선교회 중요한 결혼이 또 있었는데, 역시나 군산은 그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윌리엄 불 목사의 누나되는 마가렛 불 양이 미국에서 조선에 찾아왔다. 그녀는 선교사 신분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동생 불 목사가 머나먼 이역에서 고생한다 하니, 누나로서 부러 찾아와 격려하며, 또한 올케 앨비 불 선교사도 보고자 군산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31살 노처녀의 방문을 맞아 군산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돌려 보내지 않았다. 로티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목포에서 사역하던 홀아비 유진 벨을 군산에 불러 들여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군산의 큐피드는 이번에도 결실을 맺어 그 둘은 미국으로 돌아가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조선에 와서 목포와 광주에서 함께 선교 사역을 하였다.
큐피드의 항구 도시, 군산에서 청춘 남녀의 꿈과 사랑을 이뤘던 오웬과 휘팅, 남남북녀의 결실을 이룬 부부는 4명의 딸을 낳았으며 헌신적인 선교 사역을 이뤘다. 신부 조지아나 휘팅 선교사는 1869년 9월 12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몬슨에서 태어나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다.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유진 벨 부부와 같은 날 서울에 도착하였고, 그동안 서울에서 제중원 의사 겸 영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1900년 오웬과 결혼하게 되어 이후 신랑을 따라 미남장로교 선교사로서 목포와 광주에서 사역을 하였다. 남편 오웬이 1909년 일찍 사망하였으나, 그녀는 네 명의 딸과 함께 광주에서 10년을 더 지내며, 전도와 여성 사역에 충성하였다. 딸들이 장성하여 교육을 위해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가 1923년 은퇴하였으며, 콜로라도주 덴버에 거주하다 1952년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덴버의 페어마운트 묘원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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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05-09 16:3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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