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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 (Credo), “나는 믿습니다” Ⅸ - 이성재 목사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사도신경 첫째, 성부 하나님 고백 다음 둘째,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드디어 마지막 항목에 이르렀다.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던 사역이 그리스도의 천상의 삼중직과 관련되었다면, 이제 언급할 재림과 심판은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Pantokrator), 만군의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다시 세상에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는 그리스도는 이전의 감추어졌던 인자(人子)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시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군의 주(主)로서 세상에 오심이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적 신앙고백을 1장 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Pantokrator)라.” ‘전능하신 분’의 장차 오심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필수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이를 사도신경은 (옛),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새),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이다”라고 고백한다. 여기 새 번역은 “거기로부터”, 종전 번역은 “저리로서”이다. 사도신경을 재해석하는 필자로서 거의 80년 가까이 고백했던 “저리로서”가 무슨 뜻인지 깊이 살펴본 바 없었던 터에 라틴어 원문에 inde로 표현되었음을 볼진대 이 단어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하늘의 하나님 우편으로부터”, 곧 “그 곳으로부터”라는 말임을 새삼 알게 되었고, 그래서 “거기로부터”가 바른 표현임을 알린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 하늘(Heaven), “거기로부터” ①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재림, 마 24:30; 26:64; 고전 15:23; 살전 2:19; 5:23; 벧후 3:12-13; 요일 2:28) 세상을 심판하시고, ②하나님의 나라를 완벽하게 이루셔서 그 영광의 왕국(Regnum Gloride)을 영원히 통치하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사역에 대한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다. 정리하자면 그리스도께서 현재 현존하고 계신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 이 “오시는 것”을 파루시아(Parusia)라 하는데 이 단어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초림(初臨)과 장차 다시 오실, 곧 재림(再臨)에 같은 용어를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림(Parusia)이라는 주제만큼 기독교 역사 상 성경 전체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주제는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 승천 이후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삶의 원동력과 위로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이었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고 간절히 기다리는 만큼 상대적으로 더 왜곡된 신앙의 역사는 교회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 종파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주제도 역시 재림의 문제였고 역사상 등장했던 천년 왕국 운동론도 재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는 재림 신앙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재림 신앙과 무관한 신앙이 건전한 신앙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교회는 재림 신앙을 상실한 현세적 교회가 되고만 것이다. 그 실례가 1992년 이장림(李長林)의 다미선교회 등의 시한부 종말론이다. 그들이 주장했던 시한부 종말론 그 해 10월 28일 자정을 기해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동시에 자기들은 허공으로 휴거(携擧)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면서 방송매체까지 동원하여 생중계 할 정도였으니 그 황당함은 사회적 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해프닝으로 망신만 샀다.


■ 그리스도 재림주의 심판은 필연이다.
그렇게 친히, 몸으로 가시적으로 오시는 재림을 성경은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니라”(막 13:26). 즉 ➀승천하셔서 지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친히(Personality) 오신다. ➁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그 몸 그대로(Bodily) 오신다. ➂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가시적(可視的, Visible)으로 오신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부당하게 재판을 받으셨지만,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딤후 4:8)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고 말씀하심으로써 심판이 공개적 사건(Public)임을 밝히시면서 더욱 생동감 있게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온 세상이 모두 알 수 있게 공개적으로 일어날 것”(27절)이라고 분명히 예언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파루시아)의 목적을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심판의 구체성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마 25:31-32) 모든 사람들을 다 그 심판대 앞에 서게 하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단호하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언제 오시는가? 안토니 후크마는 재림의 때를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매우 탁월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시간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하지 말고 상황적으로 임박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재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끊임없이 기대와 준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다음의 모토가 이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내일 오신다(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내일이라도 오실 것처럼(상황적, 구속사적 의미) 생각하고 사는 것이 재림을 기다리며 늘 깨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가르침이다.


■ 그리스도 재림의 징조
그런데 이 재림에는 어떤 징조(Signs)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말씀하신다. 첫째, 여러 난리가 일어난다. 전쟁, 기근, 지진 등이 있게 된다(마 24:6-8).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난리와 자연 재해로서 이것은 재난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씀 하신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환난과 핍박, 그리고 고난에 처하게 된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죽이리니… 내(예수) 이름 때문에…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마 24:9-10) 일도 발생할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배교’하고(살후 2:3), ‘불법’도 행하는데 이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 까닭이다(마 24:12)라고 말씀하신다. 셋째,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출현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할 것(마 24:11,24)이라 하신다. 넷째, 그러나 온갖 가시밭길 가운데에서도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신다.


■ 그리스도 재림은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파루시아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종래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살펴보아야 그 심판의 역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이 있어야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성경적 역설이다. 앞서 언급했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함과 같이”(마 25:31-32) 심판은 이중적이어서 의인에게는 역설적(Paradox)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곧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이다. 그렇다. 이 예언의 성취로서 그리스도께서 우주를 심판하시려고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실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때’ “우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충성된 믿음으로 성장해 있느냐”라는 관계성에 집중된다.


■ 바른 복음의 증언과 선포
지금 우리는 지옥의 형벌을 간과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현세에 취해 살고 있다. 심지어 심판과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피하거나 축소하려 한다. 귀를 가렵게, 마음을 즐겁게 하는 위문공연(?)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분명히 말한 진 대 말씀이 증거 되는 강도대가 하나님의 진노를 정직하게 증언하기 꺼린다면 주님의 사랑도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정직하게 증언하고 선포하는 데 말씀을 가감한다는 것은 청자들(성도)을 파괴하는 것이며 모독하고 무시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자제력을 잃은 분노와는 거리가 멀다. ‘미래’에 성취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로 실현되었던 것처럼, ‘미래’에 완결될 개개인의 구원도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미래에 대한 이해는 현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성도(聖徒, Christian)란 실제로 결백해서 의인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아 주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아 성도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처참한 멸망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서 있는 성도의 두 눈에는 기대감을 가득 품고 기다리는 소망으로 충만해야 한다. 세상의 심판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봄(Visio Dei)”이다. 성도가 광풍(狂風) 속에서도 안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미래’가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미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전하기에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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