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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숨결]이재완 목사의 [존 웨슬리의 “작은 교회” 운동] ④ - 이재완 목사




이재완 목사
영암벧엘교회


웨슬리에게 교회는 “복음으로 부름받고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사랑으로 활기를 띠며 성도의 친교로 연합되어 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이것은 신약성서의 교회론과 일치한다. 웨슬리도 자신이 조직한 ‘작은 교회’를 초대교회와 같이 운영하였다. 즉, 복음 전파에 힘썼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으며, 나아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도록 성도들을 훈련시켰다. 이로 인해 이신론(Deism)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형식적인 신앙이 팽배해 있던 18세기 영국사회를 크게 변혁시킬 수 있었다. 그가 초대교회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작지만 강력한 조직인 ‘작은 교회’운영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필자는 웨슬리의 방법이 그 시대의 교회의 갱신과 선교에 가장 효과적이었다는데 대하여 동의한다.


바실 밀러(Basil Miller)에 의하면 웨슬리의 이러한 조직에 대한 재능이 동역자 휫필드(George Whitefield)보다 우수성이 발견되는 부분이다. 그가 운영하던 조직에는 신도회(Society), 속회(Class Meeting), 신도반(Band), 선발신도회(Select Society) 등이 있는데 이 중 신도반(Band)은 속회(Class Meeting)와 함께 감리교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다. 이것은 신앙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이 자라나게 하는 속회와는 달리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권면하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가입 조건과 규칙을 통해 성숙한 교인으로 성장시켜 그들로 하여금 교회 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신도반은 ‘작은 교회’운동의 대표적인 모델이었으며, 이를 통해 웨슬리는 영국교회 내의 ‘작은 교회’ 운동을 활성화하여 교회를 효과적으로 갱신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영국교회와의 분리를 원치 않은 관계로 ‘신도회’(Society)로 명명했으나 나중에는 ‘교회’로 불렀는데, 이는 신앙고백적인 모임이었기 때문이었다.


본서가 주목하는 관점은 바로 웨슬리의 신도반 조직이 외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당시 영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초대교회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단위가 소그룹, 즉 ‘작은 교회’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웨슬리의 ‘작은 교회’는 선교 도구였으며, 나아가 ‘작은 교회’를 통해 선교 전략을 펼쳤다. 그의 선교는 신학에서 창의적 종합을 이루었지만, 선교에 있어서도 ‘통전적인 선교’를 실천했다.


여기서 필자는 교회 본질이 회복되어야 교회의 사명인 선교가 더욱 극대화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소공동체 내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다. 큰 교회들이 실천할 수 없는 제자의 도를 더 쉽게 그리고 단호히 실천할 수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소공동체들은 항상 교회와 사회에서 여러모로 부족함이 드러날 때마다 이 부족함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글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있어서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영적 침체와 양극화 현상 등 그야말로 총체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꾸준히 교회 본질의 상실과 변질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세계선교대회를 통해 선교신학적인 작업은 계속되고 있지만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으로 여전히 교회는 양극화되고 있다. 특히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요 목적인 선교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다.


웨슬리 역시 그 시대에 총체적인 위기로 고통하던 영국사회와 교회문제를 그가 창의적으로 종합한 신학과 통전적인 선교신학적 통찰력으로 조직한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통해 영국사회와 교회를 새롭게 하였고, 나아가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부흥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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