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혜 잊지 말자.> 4월 2일은 종려주일이며 4월 9일은 기독교의 최고의 명절인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을 맞이하여 애독자 여러분의 가정 위에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맞아 한국 교회가 부흥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기초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부정된다면 기독교는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의 은혜와 알렌 선교사를 비롯 언더우드, 아펜젤러 이 세분의 한국 최초의 선교사님들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138년 전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날 정식으로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나님은 이 땅에 선교사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소명을 품고 이 땅에 와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고 제작하여 반포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이 땅에 좋은 소식, 복된 소식,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귀한 열매를 지금 우리가 먹고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대동강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한국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서의 순교자는 영국인 선교사 저메인 토마스 목사입니다.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 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저메인 토마스 목사는 라야다 지역의 작은 회중 교회의 사역자인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슬하에서 개신교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찍이 해외선교에 뜻을 둔 토마스 목사는 런던 대학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 신학 과정(1857-1863)을 마치고, 그의 나이 24 때인 1863 년 6월 3일 그의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목사안수를 받고서 곧 바로 갓 결혼한 그의 아내 캐롤라인과 함께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지인 중국 상해로 떠났습니다. 몇 달간의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상해에 도착했는데, 임신 초기인데다가 긴 항해 동안 심한 뱃멀미까지 겪은 그의 아내 캐롤라인은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상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동료와 함께 멀리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가 없는 동안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유산을 하고서 과다출혈로 홀로 죽어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엄청난 고통과 슬픔에 잠기게 된 그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런던선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으로 가서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조선을 새로운 선교지로 정한 토마스 목사는 일하던 세관에 사표를 내고서 조선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마침 조선으로 들어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약 일 주일 후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당도했고, 강상류로 거슬러 평양성으로 항진을 계속했는데, 배가 머물자 평양 감영의 문정관이 배에 올라와 목적지가 어디며 항해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서툰 우리말로 통역을 했는데, 문정관들은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너럴셔먼호는 항진을 계속하여 만경대 한사정 까지 올라와 조선 측에 통상을 요구했고,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성 내의 관민들이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제너널셔먼호를 향하여 물러가라고 고함을 치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상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던 제너럴셔먼호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런 와중에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제너럴셔먼호는 그만 강바닥에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이때를 노려 상류에서 작은 배 여러 척을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인 신탄선을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 신탄선이 제너럴셔먼호에 닿자 배가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불이 크게 번지자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는데, 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난 병사들은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목사 역시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성경을 품고서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토마스 목사는 강변에 이른 다음 그를 죽이려는 성난 병사들 앞에서 무릎 꿇어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렸고, 그러한 토마스 목사를 퇴교 박춘권이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렇게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만 27세였습니다.
<알렌 의료선교사>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그러나 사실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님들의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138년 전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라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날 정식으로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1년 전 139년 전에 알렌 선교사가 먼저 들어 왔습니다. 이 나라에 정식으로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입니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 올 수 있었을까요?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 입니다.(대원군의 쇄국정책-한국의 보물찾기)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149년 전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139년 전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인천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1885년 4월 12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 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 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입니다. 그 후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최초의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년~1902년)는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미국 감리교(북감리회)선교사입니다. 한국어로는 아편설라(亞篇薛羅)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는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사학인 배재학당(현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을 세운 설립자이며, 구한말 한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자녀들인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한 뒤 아버지를 이어 배재학당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했고,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현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1858년 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에서 독일계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를 1882년 졸업했습니다. 1884년 미감리교 선교 위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 조선에 선교사로 입국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으로 입국한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내리교회 창립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을 모아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고종 황제가 이름과 현판을 하사한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학교, 배재학당(현 배재고등학교)입니다. 한국에 성서 번역부가 생기자 언더우드·게일 등과 함께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 보라달로마인셔 등 성서의 국역에 참여했습니다. 교육 방식을 암기보다는 판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고치는 데 공헌했습니다.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양동교회에서 번역위원회모임에 참석코자 오던 일본 배인 기소가와마루가 어청도 서북방 2-3해리 지역에서 충돌해 침몰하면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고 다시 배에 들어가 익사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지는 가묘입니다. 시신은 아직 여학생과 조사 조한규와 함께 어청도 바다 밑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들인 H. D. 아펜젤러도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과 어머니 엘리자벳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냈습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 주 폼턴에 있는 교회를 맡았습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 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엄스의 기부(6천 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 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습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습니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고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습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 부는 게일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 부는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했습니다.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했습니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조선과 조선인을 그토록 사랑했던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회의 장을 연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