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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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속죄물로 고난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몸의 부활까지를 해석해 온 필자로서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시어…”(승천)에서 잠시 멈칫하는 마음은 ‘왜’(Why)일까? 승천(昇天, Ascension) 교리를 확실히 믿었으나 심층적으로 ‘알아가는 데’에 이를 간과(看過, Overlooking) 했었다는 약점을 깨닫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 지금까지 내가 현세적인 신앙 생활에 너무 익숙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고 하는 자책감이 깊이 든 까닭이다.
성경은 음부(陰府)에 내려가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행 1:2-32), 승천하실 때를 의도적으로 “그들이 모였을 때”(6절)로 정하신 것은 약속하신 성령을 내리셔서 성령 세례를 받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를 이루어 지상명령(至上命令, Great Commission, 마 16:18, 행 1:8)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의 약점이라면 고난과 십자가까지는 확고하게 가르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에 따른 음부(陰府)와 위 본문(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 사 2:2; 미 4:1; 벧전 1:20; 요일 2:18)에 있어서의 “이 세대”(今世, This Age) 너머 “오는 세대(來世, The Coming Age)에는 거의 기피하거나 사이비 이단들의 전유물처럼 치부하는 경향에 더해서 20세기 신학의 비신화화를 주장했던 볼트만(Rudolf Bultmann)과 같은 신신학을 그대로 수용한 진보적 신학계의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받은 결과일 것이다. 볼트만은 음부와 하늘은 공간 개념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삼층구조의 우주론에서 파생된 표상으로서 ‘음부’와 마찬가지로 ‘하늘(우라노스, Οὐρανός)’에 관한 언급을 아예 부정하면서 이에 대한 실존적 해석 조차 거부하였다. 이는 이신론(理神論)을 주장했던 18세기 독일의 헤르만 S. 라이마루스(Herman S. Reimarus, 1694-1768)의 계몽주의 사상으로서 성경의 계시와 기적, 그리고 성령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도들의 날조라고 단정지었던 성경 파괴적 사상의 계승자들이다 할 것이다. 이 신학 사상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계몽주의 철학자요 사상가 루소(Jean Jacque Rousseau, 1712-1778)와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1694-1778) 등의 인본주의 사상으로서 인간은 마땅히 ‘이성의 힘’(理性, Reason Power)과 ‘자유’(自由, Freedom)를 합리적으로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창하며 신본주의(神本主義)를 거부한 계몽주의 사상과 괘(罫)를 같이 했다. 그러나 발터 퀸네스(Walter Künneth) 교수 같은 정통주의(正統主義) 신학자는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우편에 앉으셨다는 교리를 단순히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을 반영했을 뿐이라는 볼트만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또 예수님의 ‘하늘로 올라 가심’ 즉 승천(Ascension)을 누가가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행 1:9)라고 표현한 것을 예수님의 높아지심이라는 신학적 진리를 “상징적이고 시적 은유법(Metaphor) 표현을 쓴 누가에 의한 창안”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불필요하다는 윌리엄 네일(William Neil)의 논의에 대하여 하워드 마샬(Howard Marshall)은 누가가 다른 사도적 엄존한 상황에서 이 중대한 일을 창안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탈선한 비합리적 주장이라고 반박하면서 여러 사도들에 의한 성경을 근거로 승천 사실을 변증하였다(요 6:62; 행 2:33-35; 엡 4:8-10; 살전 1:10; 히 4:14, 9:24; 벧전 3:22; 계 5:7).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다. 그러므로 목격자인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믿게 된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한 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주님께서 ‘하늘’로 가셨으므로 다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마 24:30, 25:31, 26:64; 막 13:26, 14:62)을 보게 될 것을 놀라움과 경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승천 이후로 그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약속과 같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인 ‘하늘’(Heaven)에 계신다(요 16:5, 10:17, 28, 17:5; 엡 1:20, 4:10; 히 9:24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은 어디에 어떤 성격으로 존재하는지는 규정할 수 없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영역임은 틀림없다(골 1:16). 마치 인간에게 보이는 심장(Heart)과 함께 보이지 않는 마음(Mind)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하늘(Sky) 외에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서의 또 다른 하늘(Heaven)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함께 육체적 승천을 통해서 세상의 군왕들과 주권들은 물론 우주의 권세들까지도 무덤을 정복하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게 하신다(엡 1:20-23; 빌 2:9-11; 골 2: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이야 말로 성부께서 그 분의 희생을 인정하시고 온 우주를 그 분의 통치 아래 복종케 만드신 우주적인 대관식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을 보내 주셨다(요 7:39, 16:7, 20:22; 행 2:33; 엡 4:7-12). 이로써 증인들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교회의 등장이 가능케 되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교회와 동행하시고(마 28:20), 성령으로 지켜 주시며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은사와 직무들을 가동케 하신다(엡 4:7-12). 따라서 그리스도의 승천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49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주님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둘째, 머리되신 주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도 그에게로 이끄신 것을 확실하게 보증하셨으므로 우리가 하늘에서 육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셋째, 주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보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빌 3:20; 골 3:1)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하늘에 오르시어의 승천 교리와 하나님 우편에 앉아의 우편 좌정 교리는 하나의 교리이다. 즉 그리스도의 승천과 우편 좌정 교리는 통치자의 위엄과 하늘의 심판대를 주재하는 심판자의 권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 곧 성부·성자·성령은 영(靈)이시다(요 4:14a). 영이신 하나님은 몸을 가진 우리들처럼 어디에 앉고, 서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편재(遍在)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존재를 이해하기 쉽게, 이른바 <신인 동형론적 표현법>(神人 同形論的 表現法, Anthropomorphism)으로 표현하여 인간 왕이 그의 보좌에 앉아서 그의 나라를 다스리듯이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왕으로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그렇게 의인화한 것뿐이다. 전래로 동양인들은 우편을 바른 편, 옳은 편으로 인식해 왔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주신 계시에서도 <우편>을 그러한 함의를 갖고 기록하였다. 솔로몬이 왕 위에 앉아 통치할 때 어머니 밧세바가 나오자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그가 그의 옳은 쪽에 앉는지라”(왕상 2:19)라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권능의 자리, 같은 영예의 자리, 같은 영광의 자리를 의미한다(시 110:1). 그러므로 인성을 가지신 성자께서 승천하신 후에 권능의 자리에서, 영예의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에 참여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승천 장면을 보여주신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닌,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 곧 궁창(穹蒼, Sky)이 아닌 <그 하늘(Heaven)을 제자들이 발견하고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장 칼뱅).
「사도신경」을 대하는 우리가 이상과 같은 함의(含意)를 심령에 새기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한다면 이 승천 교리에서 다음과 같은 영적 유익을 얻을 것이다. 첫째,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골로새 3장 1-4절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늘로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위로 향할 것을 수르숨 코루다(Sursum Corda), 즉 “마음을 위로 향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예배 할 때나 성찬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예배자를 ‘하늘로 들어 올리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마땅한 것은, 그리스도 승천의 이유가 우리의 지향점이 ‘하늘에 있음’을 보여 주신 그대로 마음을 위로 향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영적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천은 종말에 대한 대비와 기대를 갖게 하셨다(행 1:11). 천사들은 부활과 승천의 증인들에게 재림에 대한 약속과 함께 그 때가 이르기까지 인내로서 기다릴 것을 명령한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 시대를 살고 있다. 이에 우리는 마지막 주어지는 과제를 항상 기억하며 인내로서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영적 유익을 얻어야 마지막 승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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