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20. 목포교회 첫 세례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한국교회에서 세례, 첫 수세의 역사는 1879년 중국 만주에서 이뤄진 4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평안도 의주 출신의 청년들로 만주를 오가다 로스 선교사에 의해 전도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던 이들이다. 로스가 안식년으로 귀국하여서 이들에 대한 집례는 맥킨타이어 목사가 했으며, 시간 차를 두고 만주 우장(영구) 장로교회에서 한 사람씩 이뤄졌다. 1월엔 김진기(혹은 장진국), 4월 백홍준, 7월 이응찬, 12월 이성하에게 각각 세례가 행해졌다.

일본에서는 1883년 4월 29일 이수정의 수세가 있었다. 일본인 목사 야스가와로부터 문답을 받고 집례는 미국 선교사 녹스에 의해 로개쥬쵸(露月町)교회에서 이뤄졌다.

조선 국내에서 첫 세례자는 노춘경이다. 1886년 7월 18일 북장로교 언더우드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만 해도 의료와 교육을 제외한 기독교 전도와 교회 설치가 금지되었던 때라 비밀리에 이뤄진 일이다. 그리고 6일 뒤 7월 24일에는 아펜젤러에 의해 감리교 첫 세례자 박중상에게 베풀었다.

미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한 첫 세례는 서울 서소문 교회에서 1895년 4월 2일 전킨에 의해 두 사람에게 베푼 일이다. 같은 해 가을에는 서울 인성부재 교회에서 레이놀즈에 의해 역시 두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896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지 호남에서 사역하면서 호남의 첫 세례자를 낳기 시작했다. 군산 교회는 1896년 7월 20일 송영도, 김봉래 두 사람에게 전킨이 집례하였으며, 전주 교회는 1897년 7월 17일 레널즈 집례로 김내윤(테이트 선교사 사환), 김창국, 강씨(김제원 부인이며 김창국 어머니), 임씨(함성칠 부인), 김성희(유성안 부인) 등 다섯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목포 교회에서는 1900년 8월 26일에 첫 세례식이 있었다. 그보다 먼저 5개월 전부터 세례 문답이 이뤄졌고 이들에 대한 교육이 이뤄졌다. 3월 5일, 유진 벨과 오웬은 당회를 구성하였다. 신자들에 대한 세례 문답을 시행하려니 장로교회 정치원리에 따라 임시로나마 교회법의 절차를 갖추고자 했으리라.

당시 조선에 기독교가 여전히 초기 단계이고 총회나 노회가 구성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임의적으로 하기보다는 선교사 자신들이 미국 교회와 노회에서 배워온 것을 최대한 적용하려 했다. 그래서 목포 교회도 단순히 형식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임시로나마 당회라는 이름을 내세워 조직 구성을 하였다.

유진 벨은 당회장, 오웬은 서기로 역할 분담하였다. 당시 목포 교회 지도자로는 벨과 아내 로티, 오웬, 스트래퍼 등 4사람의 선교사가 있었는데, 벨 목사와 총각이지만 오웬 역시 목사이기도 했으니, 장로는 없었지만 두 사람으로 당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교회를 시작하면서 유진 벨과 오웬은 꾸준히 성도들에게 구원의 도리와 신앙 성숙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교회 교인으로서의 절차적 성장에 대해서도 가르쳤을 것이다. 이에 따라 성도들이 차츰 늘어감과 동시에 자신들도 세례 교인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 생겼고, 이미 1년 전인 1899년부터 4사람이나 세례 지원자가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1900년 3월 5일 목포 교회의 첫 세례 문답이 이뤄졌다.

이날 문답에 응한 이는 모두 30명이었다. 지난 해 4명에 이어 그동안에도 지원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세례 문답은 6명이 합격하고, 학습 문답은 8명 합격하였다. 나머지 16명은 다음 문답 때까지 더 준비하며 기다리도록 했다. 그리고 유아 세례 문답 역시 3명이 통과되었다. 처음 시행한 문답 결과치고는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였다.

두 달 뒤인 5월 14일 2차 대리 당회가 열려 역시 두 번째 문답이 이뤄졌다. 이때 김윤수 성도가 문답에 응하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가 양조장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한 차례 보류된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그런데 그가 지난 3월에 유예되었다가 이번 5월에 합격한 것인 지, 아니면 이번 5월이 첫 문답으로 보류되고 다음으로 미뤄진 건 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목포 교회, 봄에 이뤄진 두 차례의 문답에 이어 실제 첫 성례식은 5개월 뒤에 이뤄졌다. 왜 문답과 함께 세례 합격자가 있었는데, 곧바로 성례식을 하지 않고 좀 미뤄졌는 지는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곰곰이 살필 일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 초기 전도하며 교회를 이끌면서 세례 베푸는 것과 교회 치리에 오늘날보다는 훨씬 더 엄격하고 신중했다는 걸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일이다. 목포와 전남 교회사의 주춧돌이었던 김윤수 성도의 세례 진행 과정이 그 단적 예일 것이다. 술에 대해 단호하게 배격하는 입장을 지녔던 당시, 양조장 사업을 하는 김윤수는 당연히 부적격이었다. 김윤수는 당장에 사업을 접었다. 그리도 돈을 잘 버는 사업인데, 신앙을 쫓겠다며 폐업을 하고 몇 달을 더 기다려서 학습과 세례 과정을 밟고 제대로 신자의 길을 걸었던 그다.



날로 더해 가는 목포 교회

순전히 선교사들의 단호한 리더십이었고, 유진 벨 역시 이를 바르게 지도하며 교인으로 신자로 세워 나갔던 것이다. 돈과 세속적 권위를 뒤따르며 쉽게 교인을 받아 들이고 직분도 주는 반면, 권징과 치리에 약해진 오늘 한국 교회는 참으로 선배들에게서 배워야 하며 교회사에 대한 이해를 회복해야만 하리라 본다. 로티가 전하는 편지에 의하면 목포 교회의 첫 성찬은 8월 26일에 시행되었다.

저희는 계절의 변화를 즐기고 있습니다. 지난 밤에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아주 건강합니다. 오늘은 복숭아 통조림을 만들었고, 내일 남편의 첫 성찬식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는 여섯 명의 어른과 두 명의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 것입니다(로티, 1900년 8월 25일).

그런데, 3월 문답 때에는 유아 세례자가 3명 합격했는데, 5개월 뒤에 시행한 실제 세례식에는 두 아이만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 아이는 그동안 어떻게 된 것일까? 목포 교회의 초기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성례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데,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없는 것과 함께 6명에 대한 첫 세례자의 명단도 정확히 알 수 없음은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교회 설립 만 2년이 지나 3년차 1900년 여름, 첫 세례자를 낸 목포 교회는 이때 당시 교인 수가 50명에서 75명을 넘나들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한 해 전 1899년 여름, 30여명의 성도에서 1년 만에 두 배로 증가하였고, 성장과 함께 세례 교인도 갖추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 가장 어린(목포) 선교부에서도 선교 사역이 축복받고 있다고 보고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바를 시작하고 있으나, 수 년 안에 강하고 자립(自立)하며, 그리고 자전(自傳)하는 교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선교 사역이 시작된 지는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간은 집을 짓고 그밖에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 주일에 3번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정규 예배에 모이는 회중은 50명에서 75명으로 증가했다. 이 가운데 25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고, 세례 문답을 요구했으며, 이미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1명이 매우 만족스럽게 문답에 합격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더 많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판정받았다. 그 11명의 신자들로 복음서에 대한 정규학습 과정이 주어지는 예비신자반이 조직되었고, 그들은 지속적인 삶과 주님을 증거하는 가운데 그들의 신실성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이 가운데 3명은 이미 6개월 동안 그 예비신자반에 있었으며 그들은 매우 신실하게 학습에 임하였기 때문에 곧 세례를 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곧 완전한 신자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질 것이다.(유진 벨, 더 미셔너리, 1900년 10월).

1900년 10월에 미국 교단의 선교잡지에 실린 글인데 이 글을 작성한 때는 8월 11일이다. 첫 성례식이 이뤄지기 직전의 교회 발전상에 대한 보고다. 다소 숫자의 혼돈을 가져오는 글이긴 하다. 벨과 로티의 사적인 편지, 벨의 공적인 보고서의 내용이 시차를 두고 조금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당시 초기 문답의 여러 차이들, 즉 입교와 세례와 학습 문답의 차이와 유사성이 혼재되어 있고 분명하게 구별하여 일관성있게 일시와 더불어 기록으로 전해 주지 못해서 후학들로서도 모두 다르게 이해하고 전하고 있음은 많이 아쉽다. 그럼에도 하나님 은혜가 목포 땅에 기름부어져 복에 복을 더하는 목포 교회로 발돋움 하여 가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