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의기간은 부활절 40일 전부터 지키고 있습니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의 고난을 마음으로 되새기며 고난의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역사상 최고의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역사에 길이 기록될 고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난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주님이 당한 고난은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대속의 고난이란 대신 받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받지 않을 고난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그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두 자기와 관계되는 고난입니다.
인간의 고난에 대해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윤리적 영적 이해를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총체적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고난을 나누고 짊어졌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며, 고난에 대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강렬히 탄원하고 있고 그 탄원하는 인간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인격적이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고난에 대해서 때로는 침묵하거나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적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내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은 것은 내가 지은 그 죄로 나를 징벌할 만한 사람에게 들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관대한 사람에게 들켰거나 나와 이해관계가 있어 그 죄를 고발하지 못할 사람에게 들켰을 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죄는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죄를 짓는 자는 성경에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사망이라는 것은 영적인 죽음을 말하며,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육적인 사망 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의 대가는 당연히 말씀대로 사망이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함은 어떻게 받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함의 방법으로 지시하신 방법은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의 죄 대신에 죽으신 것(대속)을 믿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임을 입으로 고백할 때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종교는 오직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이 죄의 근본적인 해결함이 없이 자신의 노력이나 성찰로서 나 자신이 신이나 그와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범신론)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와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을 교만으로 말씀하시고, 가장 싫어하시는 죄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흘리신 보혈은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죗값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통하여 이 주님의 은혜에 만 분의 1 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당하신 것을 추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지로 내게 체험되어지는 이번 고난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말한 바울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라며 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이후, 고난이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하고,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더욱 소망을 갖습니다. 더 힘써 노를 저어 앞으로 가는 믿음은 고난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다윗, 욥, 이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진리는 고통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도록 인간을 버려두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들의 사고와 경험으로 신적 존재를 찾아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째, 인간의 상황을 둘러보고 인간보다 더 나은 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사랑인데 하나님은 더 큰 사랑이며 인간도 인격적인데 하나님은 온전한 인격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기구했습니다. 하늘의 보좌와 독생자의 영광을 버리고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가장 낮은 곳 말구유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아무리 가난해도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천대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셨는데도 누구하나 그를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사람이 많아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또 주님은 고뇌의 삶을 살았습니다. 일생이라 해야 33년밖에 안 되는 생애였지만 그 33년밖에 안 되는 그 삶이 고뇌의 삶이였습니다. 로마의 감시 속에 젊은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거기다 유대교로부터 박해와 비난이 거세어집니다. 마지막에는 법정에서도 수모를 당합니다. 창조자가 피조물로부터 재판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수모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로부터 채찍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과 온갖 수모를 다 겪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또 어떻습니까? 당시에 가장 악랄하고 흉악한 죄인만을 죽이는 형틀에서 주님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온갖 누명을 다 뒤집어 쓴 채 말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가난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왕궁에서 태어날 것으로 알고 왕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작 태어나신 곳은 셋방도 아니고 마구간에서 부드러운 이불도 아닌 강보에 싸여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을 집 한 채가 없이 사셨습니다. 죽어서는 묻힐 땅이 없어서 남의 무덤을 빌려서 묻히셨습니다. 그는 철저하리만큼 없는 자의 대표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도 처절했습니다. 인생의 최고의 복은 ‘고종명’이라고 했습니다만. 예수님은 고종명이 아니라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죽음도 뭇사람들의 질시와 시기와 죄인의 누명을 다 쓰고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부모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강도들의 틈에 끼워져서 철저하게 패배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 주님의 일생입니다. 이 세상에 부정적인 것은 모두 다 간직 한 채 죽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에? 내 죄 때문입니다. 왜? 날 구원하시려고.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지시고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신 주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신 주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말인가! 웬 은혠가. 주님의 그 사랑 크고도 크시 도다. 감사하신주님! 내 평생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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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03-24 10: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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