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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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진정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는가?’라는 이 난문(難問)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첫째는 예수님은 정말 죽으셨는가 라는 문제이고, 둘째는 예수님은 사후(死後)에 정말 독자적 방법으로 부활하셨는가 하는 여부다. 이미 우선하여 정의할 것은 전회에 언급했던 바대로 부활이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활에 해당되는 또 다른 낱말이 재생(再生, revival)이다. 분명한 것은 부활은 결코 재생이 아니다 라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5장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을 예수님이 살리신 기사가 있으며(22, 36-42),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43-44). 이 경우에 해당되는 단어가 재생이다. 이는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셔서 다시 살아났지만 다시 죽음을 맞이할 한계점이 인간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재생이 아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현현(顯現)하셨다. 따라서 부활한 자의 종착역은 영생이며, 부활은 하늘 나라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 예수님은 진정 죽으셨는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지상 생활에서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셨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마 27:50; 막15:37; 눅23:44-46; 요19:30; 고전15:3).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고 변증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가 비할 데 없는 특별한 죽으심이었다. 그러므로 완전한 참 사람이신 예수님은 인간과 동일한 죽음을 맛보셨으며,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육체 그대로 승천하셨다(눅 24:50-51; 행1:9-11). 이렇듯 그의 살아나시고 승천하셨던 그 실체가 곧 <부활>하신 몸이다. 그 주님의 ‘신령한 몸’은 여러 물리적 제한은 전혀 받지 않으셨지만(요 20:14-15, 19-20, 26-29), 모진 고초로 받으신 깊은 상처를 지니셨기에 제자들에게(요 20:20)와 도마에게 손목과 발, 그리고 옆구리를 보이시며 넣어보게 하셨다(20:26-29).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여기 ‘첫 열매’(ἀπαρχή, 아파르케)란 그리스도께서 부활로서 인류 구속(救贖)의 결실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며, 그 첫 열매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진리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롬 8:23)라고도 표현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바쳐진 부활의 첫 열매로서 모든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티누스, Christinus>,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one who belongs to Christ)이다. 생명에 대한 평가 기준은 소속, 지식, 능력 등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속이다. 포도나무(그리스도)에 생명적으로 접붙여진 가지(사람, 요 15:5)가 열매로 부활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원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을 성경이 이와 같이 확증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라고 입으로는 고백 하면서도 육체적 죽으심(의학적인 의미에서)에 던지는 이른바 초역사적(Armti-historism), 또는 자연주의적(naturalism)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문지방 교인(almost Churchian)들이 있음을 본다. 예수님의 몸의 완전한 죽으심과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교인은 사실에 있어서 영적 경계인(境界人)이다. 1908년 미국의 헨리 해밍턴(Henry Hammington)이란 의사가 주장한 견해로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 때문에 기절하여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 돌무덤에 안장되자 숨이 돌아왔다는 소위 기절설의 주창자이다. 1965년 1월 24일 자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 역시 어떤 치과의(齒科醫)의 견해를 공유하였는데, 그 의사는 입 옆에 마취를 한 환자의 각성 상태(覺醒狀態)를 관찰하면서 마취 후 여러 시간 다리를 직선으로 편 자세로 누운 채 정신을 놓았던 환자가 점차 회복하는 모습을 살피는 실험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셨던 예수님의 자세는 진료 의자에 마취 상태로 누운 환자와 동일한 자세로서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과다 출혈로 뇌빈혈 상태에서 돌무덤에 안치되셨다가 동굴의 청정한 공기로 인하여 의식이 되돌아 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의학적 반론이 나왔다. 어떤 마취학 교수는 그런 문제 제기에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근거로 기절설을 반박한 것이다. 아무리 철인적 신체 조건을 갖춘 청년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양 손목과 양 발에 대못이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를 깊이 찔려 과다한 출혈 상태로 장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사망한 자가 얇다란 세마포에 감긴 채 차가운 돌무덤에 뉘였다면 설령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저체온증과 패혈증에 의한 사망은 필연적이며 생존률은 완전 제로(zero, 0)라고 주장하였다. 아침 9시부터 심문이 시작되어 초주검이 된 상태에 이르기까지 모진 고초를 당하신 몸이 설상가상으로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 과다 출혈로 오후 3시에 절명(絶命)하신 상태로 사흘 동안 돌무덤에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기절이라니 가당찮은 억지 주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덤을 총독 빌라도의 특별 명령에 의해 로마 정규군이 철통같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데 제 목숨이 아까워 전전긍긍하던 제자들이 용기를 내어 경비병의 눈을 속이거나 병사들을 제압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일까? 전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해밍턴의 주장에 대한 반박론의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이는 의학적 내지는 과학적 관점이 아니라 성경적, 신학적 문제이다. 만약 앞서 치과의의 주장이 맞다면 신약 성경 전체의 신뢰성은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헛것이 되고 만다(고전 15:18). 또 재생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몸을 감추시고 잠적하여 숨어 지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 관한 거짓을 스스로 묵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교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거나 순교 당하는 제자들의 참상을 못 본척하고 계셨다는 것이 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서 해밍턴이나 치과의는 주님 자신이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던 예수님을 희대의 사기꾼으로 만들어버린 중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기절설은 허황된 주장에 불과하다.
∎ 예수님은 진정 부활하셨는가에 대하여
예수님이 정말 죽으신 것은 모진 고초와 결정적인 육체적 손상을 입고 죽으신 것인데 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 신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첫째로 예수님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있었고,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뵙고 싶어 갈망한 나머지 환각 상태에 빠져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환각설(幻覺說)로서 이런 이상한 주장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궁색한 허언들인 것이다. 이 허황된 주장에 역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의 고초와 주검을 직접 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환각에 빠졌거나 5백 여 성도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시에 보이셨는데(고전 15:6) 이 사실을 환각에 빠졌다? 라는 주장이 과연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보고 손가락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넣어본 사실에 입각하는 정확한 검증(요 20:24-29)이 이 허황된 환각설을 잠재운다. 사실 제자들도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서도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깨닫지 못하였다(요 20:3-9). 엠마오로 가던 길을 예수님과 동행하던 두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더디다. 미련하다”(눅 24:25)라는 책망을 받았다. 둘째로, 적인가(유대교 당국). 아군인가(로마 관헌)가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그 시체를 어딘가에 숨겼다는 이른바 도적설이다. 유대교 당국(오히려 로마 관헌)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하려 했다는 발상은 절대 착각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짓을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문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오히려 당국은 도굴 방지에 필사적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철통같은 경비며, 커다란 돌문에 갇힌 그 시체를 제자들로서는 전혀 불가능했다. 아예 제자들에게는 그런 엄두를 낼 마음의 여유조차 전무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스승을 배반한 제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진정 죽지 않으셨다면, 기독교가 성립되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세계 역사와 문화를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기독교는 거짓 종교로서 초대 교회가 성립되기 전 이미 지구 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정말 죽으시지 않았다면 그 복음이 사기(詐欺)가 되어 기독교가 잠시나마 세상에 미쳤던 유형무형의 영향들은 혐오(嫌惡)와 조소(嘲笑)의 적(敵)이 되었을 것이다.
∎ 유일한 해답
그렇다면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아…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가 유일한 해답이다. 이 해답이야말로 문서(성경, Bible)와 사실(역사, History)을 일치시킨다. 이 해답만이 당초 낙담과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저토록 확신에 찬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이 얼마나 강열했기에 그들에게 적대적인 세상으로 나아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하게 전하며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세우게 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일차 실축되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다시 회복되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성령의 내주하신 능력으로 가능했다는 설명 이외에는 어떤 이론도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하늘로 오르시지 않았다면 성령 강림은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우리에게 마라나타(maranatha, <주여 오시옵소서, O LORD, come>)신앙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2천 년에 걸쳐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았던”(빌 3:10) 무수한 그리스도인의 증언들이 있었고,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전파하는 구원의 복음이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비치는 생명의 빛이요 그 빛 되신 예수님을 주(LORD)와 그리스도로 믿고(faith), 증거(witness)하는, 증인(순교자,martyr)으로 살아가는 이가 진정한 부활 신앙을 장착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2천 년 전, 고린도교회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부활이 있기에 날마다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