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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3.1운동과 한국 교회(Ⅰ) - 김상열 장로




김상열 장로
(목포남부교회 원로)



이 설움, 저 설움해도 나라 잃은 설움보다 더 큰 설움은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설움을 맛보았고, 저도 나라 잃은 설움을 맛보았습니다. 말, 글, 성도 잃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강제로 공출로 다 빼앗아가고 보리 가루 죽 먹고 살았습니다.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삶은 천국입니다. 세계에서 지금 우리 나라같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나라는 드물 것입니다.


기미년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동했고 주최자가 되었습니다. 다음달 3월 1일은 3.1독립만세 3.1절 10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경험이 참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살아가는데 많은 유익을 줍니다. 특히 배고픔의 경험은 생각을 넓게 해 줍니다.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줍니다. 인생의 깊이를 알게 하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여 삶을 겸허하게 해 줍니다. 실패의 경험도 참 좋은 기회가 되고 소중한 기회로 활용됩니다. 삶의 눈이 뜨이고 모르던 부분을 알게 하고 보게 해 줍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자만하지 않게 해 줍니다. 암담한 현실의 경험도, 중병의 경험도 때로 삶을 침착하게 만들고 겸허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때 삶에는 또 다른 손길이 있음을 알게 되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여 삶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북에 살다가 월남한 분들은 대부분 강합니다. 사선을 넘어 온 경험 때문입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역사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민족이 오늘 세계 속의 한국을 이룬 것은 이런 고난이나 아픔을 일찍 경험했고 그 아픔 속에서 얻은 경험과 의지가 오늘의 이 발전의 삶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를 당할 때 현실의 암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고픔과 절망과 서러움을 경험하였습니다. 내 땅에서 남의 지배를 받고 농사를 지어도 모두 수탈당하고 처녀들이 공출당하고 젊은이들이 좌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라의 소중함을 발견하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고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오늘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배경에는 이런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에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사용하여 미래를 여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손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어진 핍박은 기독교에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은 기독교의 확장으로 세계화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 나라가 기독교 강국이 된 것도 이 역사속의 핍박과 고난과 전쟁과 일본 압제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였고 기도하였고 전도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더불어 확장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날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은 아픔이 주어질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일제 침략이 우리 나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부로부터 압박과 설움을 받을 때마다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는 미국을 의지하게 되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과 하나님을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만드는 작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1831년 9월 9일 로마 교황청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교구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오로지 종교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이 로마 교황청에 엄중 항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로마 교황 그레고리 16세는 엄격하게 한국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그리고 1882년 3월 미국이 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때 중국은 또 항의했습니다. 그때 미국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한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북경의 미국 공사관과 동격으로 서울에 미국 공사관을 설치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미국과 연대의식을 강화하여 조선의 근대식 교육을 위해서 1886년 6월에 미국 정부에 훌륭한 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에 미국은 신학교 출신자 3인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에 기독교와 기독교 정신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마침내 우리 민족의 대들보로 입지를 굳히게 된 사건이 1895년에 두 가지가 발생하였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대문 안에 살던 사대부의 지배층들도 전염병으로 가족이 죽어 나갔고, 사람들이 밖의 출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길거리에 그냥 버릴 정도였고, 그것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러자 시국이 뒤숭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완장을 차고 내다버린 시체들을 정중히 입관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고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데려다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환자 308명 중 145명이 살아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기독교가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된 한 가지 사건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명성황후인 민비의 시해사건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던 날 고종은 분노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구둣발로 침실까지 들어와 명성황후를 칼로 죽인 일본 군인들이 자신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은 선교사들을 불러 신변보호 요청을 하였습니다. 일국의 왕이 이 땅에 와 있는 외국의 선교사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5명의 선교사가 입궐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고종을 곁에서 지켜주었습니다. 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 이 나라를 붙잡아 준 것은 기독교뿐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지 10년 밖에 안 되는 기독교가 왕을 보호해 주었고 이 민족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한국 기독교는 고난 받은 우리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 발전하여 한국은 유일하게 종교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싸울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한국 교회가 이 나라의 임금을 충성스럽게 모시고 고난 받는 이 민족과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리교 출신 존스 선교사가 1901년 한국에서는 기독교보다 더 나은 애국과 충성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문서로 보고했습니다. 그 살벌한 때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당시 기독교인들이 정동교회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일 년 후인 1896년에 영천에 있는 독립문에서 고종탄신기념축하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행사가 있기 하루 전 독립신문에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할 것이고 애국가로 노래할 것”이라고 광고까지 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백성들이 임금님의 탄신을 경축하는 대회를 연 것은 그때 기독교뿐이었습니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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