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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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9월 초 아내 로티와 아들 헨리가 목포로 이사 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주로 서울 집에 거하였지만, 지난 3년간 충청 강경을 비롯해 군산, 전주, 광주, 좌수영, 나주, 목포 등을 정탐하고 출장 다니느라 가족과 거의 떨어지다시피 하였다. 이제 비로소 올해 봄 들어서는 목포에서 선교부 준비하며 결국 지난 5월 하나님 은혜로 최초로 목포 전남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예배하며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유진 벨, 아직 의사는 옆에 없었지만 더 이상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 어려웠다.
유진 벨이 자신의 사역지라 여겨지는 목포에서 가장 가까운 동료이며 아내인 로티와 함께 주의 선교를 할 수 있어서 참으로 힘이 생겼다. 이제 두 살 된 아들 헨리도 더욱 무럭무럭 자라며 이젠 뛰어 다니기도 하고 말도 제법 할 정도니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기만 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도 목포로 왔다. 서울이 아닌 먼 지방에서 사역하면서 얼마나 의사가 절실히 필요했던가. 의사 오웬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어 오리라는 것은 오래된 일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드디어 보게 되었다. 1898년 11월 6일 오웬 선교사는 목포에 도착하였다.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오언, 오기원)은 1867년 7월 19일 태어났다. 유진 벨이 1868년생이니 그보다 한 살 위인 셈이다. 오웬이 태어난 동네는 버지니아주 핼리팩스 사우스보스턴 지역에 있는 블랙월넛(Black Walnut)이라는 마을이다. 그의 아버지는 Robert Lee Owen이고 어머니는 Mary Grigsby Carrington이었는데, 부친은 오웬이 4살 때 돌아가시고 말았다.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는데, 그의 조부는 그 지역에서 상당히 거대한 땅을 지니고 담뱃잎 농사 등을 하는 거농이었다. 오웬의 집 사이로 지나가는 기차가 있고 오웬 집 앞에는 기차역이 있을 정도였는데, 오웬 집에서 수확한 담배 원료는 이 역을 통해 버지니아 주의 세계적인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로 납품되었다.
아버지와는 너무 일찍 이별하였지만, 조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오웬은 햄던 시드니 대학과 유니온 신학을 다녔다. 모두가 버지니아 내에 있는 미남장로교의 명문 학교들이었다. 미국 수도 워싱턴 이남 지역에서 보수적이고 정통 장로교 집안에서 자란 우수한 아이들이 가는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은 노스캐롤라이나의 데이비슨 대학과 버지니아의 햄던 시드니 대학이 있었다. 목사가 되기 위한 신학교로는 콜롬비아 신학교와 유니온 신학교가 있었다. 조선에 온 대다수 미남장로교 목사 선교사들은 대부분 이들 학교를 거친 수재들이었다.
오웬은 햄든 시드니를 거쳐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에딘버러 대학의 뉴칼리지에서도 3년간 수학하였다. 그리고 리치몬드의 유니언 신학교를 1894년 졸업하였고, 버지니아의과대학에서 2년을 더 수학하였다. 그리고 1894년 6월 18일에는 로어노크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고향 마을 근처에 있는 스프링힐 장로교회에서 협동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이번엔 버지니아 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이미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하였지만, 목회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의학 공부를 하였고 공부와 함께 이 학교의 교목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2년간의 의학 수업을 마치고 1896년 의사 면허도 취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897년 2월 9일 미남장로교 조선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 와중에 뉴욕 병원에서 임상 수련과정을 가졌고 마침내 1898년 가을 미국을 출발하여 11월 6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불타며 비추는, 저 완전한 날을 더욱 더 비추는 빛’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을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기름을 사용한 후에 미국에서 이곳으로 기름을 날라 온 통들을 물을 나르는 데 사용한다. 우리 조국(미국)은 한국의 빛의 출처일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 신선한 물을 나르는 통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주님이 사용하시는 통들이 아닌가?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목적은 비록 질그릇과 같은 우리라 할지라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하고자 하심이 아니겠는가(오웬, 더 미셔너리, 1899년 9월).
밤이 깊은 저녁에 양동 집 마당에 나와 바라본 유달산, 그 언덕 곳곳에 촘촘히 들어서 있는 초가집들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 볼 때마다 오웬은 하늘의 은혜를 찬송하며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하고 충성을 일구었다. 저 어둠을 밝히는 불빛들, 그 등불을 밝히는 기름은 미국에서 날라온 것이었다. 오웬도 역시나 머나먼 태평양을 넘어 이곳에 왔지 않는가? 그는 목포의 어둠을 밝히는 미국산 기름처럼, 자신도 목포의 영적 어둠을 빛으로 바꿔내는 인생이고 싶었다. 죽음의 땅을 생명의 동산으로 바꾸는 선교 사역자가 되어야 했다. 그 일에 기꺼이 영적 기름처럼 자신도 소모되길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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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과 함께 목포와 전라남도 교회를 개척한 오웬 선교사 |
완성된 베리 하우스
그리도 기다리던 오웬 의사가 목포에 와서 너무도 기뻤지만, 아쉽게도 아직도 집 공사가 마무리 되지 못해 참 불편했다. 별수 없이 임시 사택인 초가집에서 같이 지내야 했다. 당시 총각이었던 오웬은 벨의 집에 일종의 하숙생처럼 지냈다. 아마 예배실로 쓰는 사랑방에서 지내며 하인 요리사의 도움을 얻어 로티가 챙겨주는 밥을 함께 먹고 지냈으리라. 물론 오웬은 하숙비를 톡톡히 내야 했다. 같은 선교사가 동역자라 해도 미국인들이 엄격하게 공사를 구분하지 않나. 이제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데 벨은 새 사택 공사가 언제 완성될지 한편으론 걱정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완공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전히 미적거리던 집이 마침내 마무리 되었다. 12월 중순경 지난 봄부터 해오던 정식 사택이 마련된 것이다. 일군들의 늑장에 참으로 유진 벨은 애를 많이 먹었는데, 그래도 내부까지 제대로 마무리 하여 임시 사택에서 짐을 새 집에 옮기고 방에 들어가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벨은 이 집을 ‘베리 하우스(Barry House)’라 명명했다.
이 건물을 짓는 비용을 헌금한 이는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캐리 부인이다. 미화 1,500달러의 거금을 내어 목포에 참으로 귀하고 좋은 사택 건물이 지어졌다. 캐리 부인은 헌금을 하면서 자신의 이모인 ‘베리(Barry)’를 기념하여 달라고 하였다. 베리 하우스 건물은 참으로 멋지고 훌륭했다. 125년 전쯤에 지어진 것치곤 대단히 럭셔리하다. 문화 문물이 훨씬 성장하고 발달한 지금에 이르러서도 당시의 그 건물은 상당히 고급스런 주택이다. 유진 벨 개인의 사택이긴 했지만, 목포를 방문하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게스트룸으로도 사용했을 것이고 상당히 유용하게 쓰인 목포와 전남의 최초 선교 콤파운드 건물이었다. 사진으로는 그 멋진 모습이 전해져서 상당한 감동을 주는데 아쉽게도 언제 어떻게 이 건물이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도 기억하는 이 없어서 참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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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02-17 10: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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