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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 (Credo), “나는 믿습니다” Ⅴ - 이성재 목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마리아를 택하셔서 성자 예수님의 출생의 도구로 삼으셨다면,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위해 십자가를 사용하신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틀이었다. 당연히 십자가 형(十字架刑)은 극형 중의 극형이요,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수는 가장 저주 받은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는 자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로마 권세의 가장 잔혹한 형틀인 십자가에 ‘당신의 유일한 아들’을 매달도록 결정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 군중들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했던 상황(마27:24-26;막15:15;눅23:23-25;요19:5-16)에서 누가의 표현은 매우 심각하였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23:23-25). 사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형은 영원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의 표상이었다. 다만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당시 사법과 행정을 관장하는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어 십자가에 처형케 하심으로써 ‘죄악에 빠져있던 인간 구원을 이루신 역사적 전환’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1장 23하반절의 인용구(引用句)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즉 신명기적 이해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나무에서 저주 받은 죽음으로 친히 죽으심으로써 우리(인간)의 죄를 향한 그 무서운 저주(진노)에서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성경은 한결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막10:45). 그래서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사”라는 고백으로 구원의 핵심 진리를 일깨운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위에서 실제로 숨을 거두셨으며, 그 후에 장사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예루살렘 성전에 운집했던 국내의 순례자들 앞에서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증거한 후,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였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박아 죽였으나”(행2:22-23).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예수님에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원대하고 철저한 구원 계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고 설파하였고, 이 강설을 듣고 그날에 회개하고 세례 받은 자가 무려 3천 명이 넘었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행2:37-41절). 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1장 23절, 24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변증한다. 이처럼 베드로나 바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특별한 의미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사건인가? 어찌하여 하나님은 유일하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버리셨는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일들이 주어지는가? 이와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첫째, 성경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위한 죽으심이라고 말한다(롬6:10). 여기서 죄를 위한 죽으심이란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代贖)의 죽으심, 세상을 향한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福音,Gospel)」을 말한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b). 그렇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인이 받게 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죄 값을 치르셨다(고후5:21). 이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인간의 죄는 간과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롬3:25)라는 선언이다. 요한 신학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변증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판단하려 하심이라”(요3:14-17). 요약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자리인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계시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든 신학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구원)의 경륜으로 집약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음의 강력한 상징이 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요, 이 십자가가 세상 속에서는 수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를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이 곧 복음의 핵심임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은 로마 제국의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고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일지라도 그 위에 흐를 그리스도의 진홍색 핏물에는 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다(찰고,고전1:23-24).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으면 삶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리라”(갈6:14). 바울은 세상을 다 잃어도 그리스도를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다고 단언한다(빌3:7-8). 이렇듯 십자가는 사도 바울의 전부였듯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참된 영광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중죄인을 벌하는 형틀이 아니라 영광의 기념비인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5b-6).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두 관점의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완전히 거룩하신 신(God)이시므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며 영원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존재다.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죄인을 향한 진노의 심판을 발하고 계신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해 속죄 제물을 드렸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구약의 속죄 제물이 근본적으로 흠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히7:18-19a), 이는 구약의 희생 제사가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 제사장이,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장막에서, 인간의 양심에서 지은 죄를, 씻을 수 없는 짐승의 피로 드린 제물이었기에 근본적으로 연약하고, 무익하고, 흠이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히10:1-11). 그러므로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가 이루어지려면, 근본적으로 ➀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➁제물을 드리는 장소로의 성소와 지성소를 가진 장막, ➂피 흘려 죽은 제물 등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이에 신약의 히브리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약 제사의 세 가지 요건을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치르셨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➀예수님 자신이 죄인들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릴 큰 제사장이셨고(히7:26-28), ➁하늘에 있는 참 장막이신 예수님이 친히 몸을 입고 강생하셔서 완전한 속죄의 제단이 되셨으며, ➂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영원히 구속의 효력을 가진 하나님의 정의로운 제물이 되신 것이다(히9:25-28). 이와 같은 점에서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분명히 드러났다(참조.신12:23). 이 죄스럽고 감사하기 그지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대속의 은혜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고후5:21)고 고백한다.

이상 십자가의 은혜가 주어지는 신학적 원리의 하나는, 죄인인 인간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대표(representation)로 서신 것이라는 원리이고(마26:28), 둘은, 주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옛 사람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죄의 권세와 정죄에서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원리이며(고후5:17). 셋은, 대속(代贖,substitution)으로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인된 우리의 수의(囚衣)를 벗겨 입으시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치루어야 할 죄의 삯을 온전히 다 지불해 주셨다는 원리이다(롬4:25).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동시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냥 없는 것처럼 취급할 수 없으시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Justice)와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죄에 대한 의로운 심판을 행하셔야 하므로 결국 죄인을 의롭게 사랑하는 길, 곧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롬3:25-26;요일4:10).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통해 최선을 이루신 자신의 절대 주권의 영광을 현시(顯示)해 주신 은혜로 거듭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배자이어야 한다(마16:24)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십자가 형의 결과는 죽음 이외의 다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 당하심과 십자가 형에 이어서 “죽으시고”를 고백하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죄의 삯”(롬6:23)으로서의 죽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한 죄에 대한 심판의 죽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활동의 정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단절로서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죽으시고 장사된지에 이어서 “장사되셨다”는 말은 죽음에 대한 부가적 표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陰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주권자로 소개된다(계1:18). 음부로 지칭된 곳은 히브리어 ‘스올(sheōl)’, 헬라어 ‘하데스(ἅδης)’를 가리키는 것으로 ‘죽은 자들이 거하는 영역’을 말하는데, 베드로는 다윗의 시(시 16:10)를 소환하여 오순절에 강설하기를 다윗이 자기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보고 노래했다고 변증한다(행 2:29-31).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고 영으로 죽은 자들의 영역(하데스)에 들어가셨지만, 버림은 당하지도, 육신이 썩지도 않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라고 증거 한다. 장 칼뱅(Jean Calvin)은 예수님의 음부행을 가장 낮아지신 차원(빌2:8)과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의 차원으로 가르치고 있다(제네바 요리문답 66,67,70). 또한 칼뱅은 「기독교강요」애서 음부에 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맺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권세와 죽음의 두려움과 지옥의 고통과 친히 맞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이기시고 개선하셨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왕께서 이미 삼켜버리신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참조.벧전3:22).


결론적으로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이 고백은 선교적 사명을 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감사와 주님께서 분부하신 지상명령(至上命令,마28:18-20)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출발점에 우리가 다시 서야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하자.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신다(찬송가 461 장).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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