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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Credo), “나는 믿습니다.” Ⅳ - 이성재 목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아래서) 고난을 받아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이렇듯 간단하게 고백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캐리그마적 (福音書的) 고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역점을 두고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 복음서이며, 복음서의 이러한 의도에 맞추어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내용을 간단하게 총괄한 것이 사도들이 고백한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들도 이와 똑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사는 것이 은혜 중의 은혜라고 자부한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정비해 보아야 할 것은, 적어도 우리가 이 사도적 전승의 신앙을 지켜나간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으뜸의 관심은 당연히 십자가와 부활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봉사와 그 놀라운 이적 기사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건들 뿐이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들의 고백에서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로 뚝 잘라 예수님의 고난을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고백을 원래의 의미로 직역하면 “passus sub Pontio Pilato,” 즉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sub) 고난을 받아”이다. ‘빌라도에게’ 보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더 정확한 듯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마디로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었다(빌2:5-11). 그런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낮아지심이다. 더욱이 ‘만왕의 왕’(King of Kings)이시요, 만 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가장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육신하신 목적(self-identity)을 스스로 밝히시기까지 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죄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당할 고난을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고난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난 받으실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히 알려주고 계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고난의 시작이고, 오실 목적도 고난을 당하시기 위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신 이유는 우리를 위하여, 즉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종교 기득권층으로부터 고난을 받았고, 로마 제국의 눈에는 정치적으로 선동자로 비춰졌으며(마27:11), 제자로부터 배반(마26:48)과 부인(마26:70-75)을 당하셨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셨고(마27:11-14), 급기야 십자가형으로의 모진 고초를 당하셨으며, 무죄한 분이 끝내 죄인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음까지 경험하셨다(마27:46). 이 모든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므로 받게 되는 고난이 아니라 인간이 되심으로써 받게 된 고난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오심이 고난을 전제로 오셨고, 오신 목적도 고난당하시기 위해 오셨는바, 이 고난은 아픔의 차원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속죄의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받게 되는 고난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숙이 각인시켜야 할 신앙적 자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고,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요 극치이다(요3:16). 주님께서 낯선 곳 가축의 구유(파트네,φάτνη)에서 비천하게 출생한 것 자체가 고난이요, 만군의 주께서 죄의 형태로 사신다는 것, 무죄하신 분이 날마다 죄인들 사이에서 사신다는 것, 거룩하신 분이 죄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사신다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벌코프).


우리 성도가 성찬식에 선 ‘나’는 고난의 참 의미, 곧 한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remember)하는 역사 현장에 있다는 결연한 자세로 빵과 포도주를 받고 있는가, 자성해 본다. 예수님 스스로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14:24) 소개하시고, 또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고난이 죄인된 나를 위한 고난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모습에서 뼈아픈 마음의 통증을 느낀다.


끝으로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신다. 히브리서는 예수님 자신이 시험을 받으심으로써 고난을 당하셨기에 시험 당하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말씀하신다(히2:18). 사실 고난의 의미 중 이러한 차원은 과거에는 별로 주목을 끌지 않았었다. 그러나 인류가 세계 제1차, 제2차 대전을 비롯한 여러 전쟁과 여러 아픔을 경험한 인간의 절망과 집단적 범죄 현장에서 신정론(神正論)이 강하게 부각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고난, 즉 십자가 신학이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점은 괄목할만하다. 과거는 교조적 의미로의 정죄신학(定罪神學)이었으나 소위 집단적 범죄 행위로 인하여 발생되는 무고한 고난의 문제야말로 고난을 대하는 새로운 신학적 접근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난을 멀리서만 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에 임마누엘로 함께 계신 분이시며, 고통 당하는 인간과 함께 울고 가슴 아파하여 그 가운데 위로를 베푸시는 분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상(像)이 해석된 것이다. 이는 “그가(예수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하신 말씀을 그대로 적용했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무고한 고난을 당하는 수많은 인류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런데 이 고난의 한 가운데에 본디오 빌라도라는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예수님의 고난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며 사실적인 고난인 것을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과 마리아 외에 사도신경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사람’의 이름이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는 시리아 지방을 다스리던 총독이었다. 로마 제국은 당시 세계 패권국가(覇權國家)였다. 로마 본국에는 황제가 있었고, 그 밑에 13명의 총독이 식민지를 대리 통치하는 구조였다. 그 식민지 가운데 시리아(수리아)를 다스리던 총독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 (A.D 26-36, 재임)였으며, 유대는 시리아의 한 부분이었다. 시리아 총독부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위치해 있었으나 유월절을 전후하여 예루살렘에 정치적 소요가 발생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빌라도는 잠시 예루살렘에 체류하던 중 예수님을 재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당시 로마 지배 하에 있던 각 국의 왕들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예수님과 기독교 박해에 앞장 섰던 헤롯 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식민지의 사형권은 총독에게 있었다. 유대에는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공회’라는 종교, 정치, 사법을 어우르는 기구가 있었다. 유대인의 ‘최고 권력기구’였으나 로마 식민지 통치 하에서는 죄인의 사형, 집행 판결권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권력 관계로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예수님의 재판에 관여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 고난을 안기고 십자가에 죽게 한 자가 빌라도라고 사도신경은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대제사장 가야바였다(요18:13). 예수님을 체포하게 한 자도 가야바였고,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끌고 가게 했던 자도 가야바였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주관한 자 역시 가야바였다(마26:14-16,27:3).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도신경에 ‘가야바’라는 이름은 아예 나타나지 않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게 한다. 왜 그럴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형 최종 결정권자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였고,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견 예수님께 대한 두려움을 은근히 품고 있었다. 재판 전 날 밤 빌라도의 아내가 상서롭지 못한 꿈을 꾼 이야기가 마태복음 26장 19절에 나온다. 꿈의 내용은 생략되었지만 상황은 이렇다. 아내는 재판정에 있는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 정의로운 사람(예수)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전하면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가 많이 탔다”라고 알린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의 소요(騷擾)와 게릴라의 출몰로 불안한 치안 상황에다가 더욱이 얼마 남지 않은 유월절에 대대적인 예루살렘에서 소요와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있고 해서 두려움에 무척이나 고심하다가 아내의 부탁을 묵살하고 대제사장 가야바를 비롯한 산헤드린공회의 사람들과 유대 군중들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고 만다. 빌라도는 정치적 욕망이 대단한 자였다. 여타의 총독들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철권정치로 자기 권역(圈域)을 다스렸다. 인간에게 욕망이 지나치면 진실을 잃게 마련이다. 그런 성향을 가진 자의 공통점은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정의’를 유린하고 교활하기까지 한다. 빌라도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무죄하면 정직하게 방면(放免)하는 것이 정의로운 데도... 무죄한 사람에게 죄인의 누명을 씌운 후 석방한다는 잔꾀는 곧 범죄 행위이다. 어떤 명분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행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빌라도는 자기 꾀에 스스로 걸려든 음모가 바로 유월절 흉악범 방면사건(放免事件)이다(마27:15-26; 요18:39-40).


이스라엘에서는 매년 유월절이 되면 백성들의 희망에 따라 죄인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었다. 빌라도는 이 때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죄 없음을, 당연히 풀어 주어야 함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소요와 반란이 두려워 일단 죄인으로 프레임을 씌운 다음에 방면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격이라 할까, 빌라도의 잘못된 생각은 결국 자기 꾀에 스스로 걸려들게 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주관으로 어떻게든 교활하게 일을 처리해보고자 했으나 결국은 자신의 음모에 스스로 걸려든 것이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흉악범 바라바를 예수님과 함께 내세워 시민들의 뜻을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히 예수님을 풀어 줄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사람들은 바라바를 택하였다. 빌라도의 허가 찔리는 순간이었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척척 진행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본다. 빌라도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본디오 빌라도는 재판을 마치면서 자신의 손을 씻는 ‘예(禮)’를 행한다. 그리고 하는 말인즉, “이 옳은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죄가 없다. 너희가 당하라”(마27:24). 이 어리석은 사람을 보라! 손을 씻는다고 그 큰 죄가 없어지는 것인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이다(마27:11; 요11:35,37).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강조한 것은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야 정치적 범죄가 성립되고 처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수님이 정치적 의미의 ‘왕’이 아닌 줄 알면서도 끝까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웠으며, 심지어는 예수님을 매단 십자가에도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를 붙이게 했다(마27:37; 요19:19). 이에 대하여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은 “그는 우리의 왕이 아니니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강하게 요구하지만(19:21), 그러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라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을 우겼다. 이는 ‘너희들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처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마27:43)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총독의 지위에 얽매인 나머지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하고 만다. 내가 살려고 할 때에 예수님을 죽이게 된다는 진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정도로 나약한 분이라고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앞서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대인의 왕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거침없이 “너의 말이 옳다”(마27:11)고 대답하셨던 그 당당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는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아래서 받으신 그 고난은 능동적인 고난이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산하시는 도중 베드로의 돌발 사태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묵상하자.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더라”(요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곧 십자가를 받으심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26:53-54).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이유, 즉 능동적으로, 당신 스스로 죽음을 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는 주님의 능동적 행위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최고의 구원의 선물이다.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모순되고, 부조리함과, 억울한 고난이 주어지는 환경과 일상 속에서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하며 자족(自足,빌4:12)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고난 뒤에 펼쳐질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올곧게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께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의 찬송을 부른다.


주 당하신 그 고난 / 죄인 위함이라 / 내 지은 죄로 인해 / 주 형벌 받았네 / 내 주여 비옵나니 / 이 약한 죄인을 / 은혜와 사랑으로 / 늘 지켜주소서(찬송가 145장 2절)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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