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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물근원을 고쳐라, 목포 교회여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1898년 5월 15일, 유진 벨은 목포에서 사람들과 함께 첫 공식 예배를 드렸다. 목포교회의 시작이요, 전라남도 교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선교지에 와서 현지인들과 드린 첫 예배, 그래서 목포와 전라남도의 공식 예배요, 목포 교회의 설립일자는 이 날부터 기산한다. 유진 벨은 이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편지에 기록으로 남겼다.

오늘 아침, 많은 여자를 포함한 큰 회중이 모여 저는 대단히 고무되었습니다(유진 벨, 1898년 5월 15일).

유진 벨은 많은 편지 기록을 남겼다. 1895년 서울에 도착해서 1901년까지 편지만 해도 거의 500여통에 이른다. 1901년 아내 로티가 일찍 사망하지만 않았어도 그들 부부는 엄청난 양의 편지를 남겼을 것이다.

그 많은 편지 가운데 자신이 조선에 와서 사역하면서 목포를 비롯한 전남에서 예배하였다는 기록은 이 날에 처음 나온다. 1898년 5월 15일 주일 아침에야 비로소 목포에서 예배드린 일을 아주 짧게 단 한 줄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매우 의미있게 여기는 것은 그의 행보와 시간적 과정에 비춰 이날을 목포 교회의 설립 일자로 간주하기에 매우 유효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목포든 나주든 어디에서고 그 이전에 사람을 모아놓고 공예배를 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 이전 교회 설립이란 있을 수 없다.

유진 벨이 목포교회를 시작한 이후 2023년 5월이면 125주년이 된다. 그런데 목포의 최초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는 아직도 잘못된 설립 일자를 지키고 있다. 오래 전부터 1897년 3월 5일을 교회 시작일로 지켜오는데 이는 참으로 틀린 역사이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의 출처는 1930년 발행된 “목포부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펴낸 과거의 많은 기록물은 대부분 왜곡되고 틀린 내용 일색이다. 조선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는 많은 것들을 없애 버리고 그들의 그릇된 욕심에 맞춰 비틀거나 나쁘게 만들어 버렸다. 목포부사는 당시의 목포에 관한 모든 중요한 내용들을 집대성한 기록물인데 순전히 일제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기독교 등 종교 편도 예외 없었다. 미국 등 서구가 이 땅에 전해준 기독교 선교에 대해 그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목포의 기독교 역사를 기술하는 것도 제멋대로 해버렸다.



1898년 5월 15일 유진 벨이 쓴 편지

당시 목포의 사택(예배실 포함) 설계도와 함께 그날 아침에 목포에서 예배하였다고 써있다.


 



목포 교회 설립일? 바르게 하자

객관적으로 잘 조사하거나 마음을 써서 잘 기록한 게 아니라 너무 무성의하게 써버린 기록물, 일제 식민사관에 기초하여 쓰인 것을 우리 목포 교회의 설립일로 잘못 지키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목포부사는 유진 벨이 1897년 3월 5일 목포교회를 시작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를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몇 교회들이 교회사에 기록하고 지켜 오는 것은 참으로 씁쓸하다.

지난 연재에서 자세히 살폈듯이 유진 벨은 목포에 없었다. 1897년 3월 5일 아침에는 서울에 있었고 오후에는 제물포까지 여행을 했으며 그날 저녁에는 제물포에 있었다. 그리고 3월 5일은 주일(일요일)도 아니었고 금요일이었다. 유진 벨이 목포에 없는 데, 어떻게 그를 설립자로 한 교회 설립이 있을 수 있는가, 엉터리다.

왜 다른 선교 행적이나 교회사는 선교사의 편지나 보고서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정작 설립일자는 애써 유진 벨의 편지를 무시하면서, 일제 식민사관에 기울인 일본인들의 기록을 맹종하는 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1898년 목포 교회 시작은 그 뒤로도 벨 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포의 후배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거론한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발행하는 ‘더 미셔너리’와 ‘더 미셔너리 서베이’ 잡지는 한결같이 목포 선교를 거론할 때 1898년으로 나온다.

더하여 한국 장로교 최초 공인 역사책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도 목포 교회는 1898년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1898년 목포부 양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배유지와 매서 변창연이 당지에 와서 양동에 장막을 포진하고 선교를 시작하여 열심 전도하므로 노학규, 김만실, 김현수, 임성옥, 지원근, 마서규, 김치도 등 20여 명이 신종(信從)하여 교회가 수성(遂成)되고 의사 오기원이 적래하여 의약과 복음으로 예수의 자애를 현실하니 신도가 날로 증가하더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1928년 발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발행한 것이다. 당시의 조선 장로교회의 역사와 교회 현황을 기록한 것인데, 이 책에는 목포(양동)교회가 1898년에 시작했음을 말한다. 더 정확한 월, 일까지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방식은 당시 전국의 모든 교회를 소개하면서 다 이렇게 년도와 교회명을 적어 동일하게 하였다.
 
이 기록물을 만드는데 직접 참여한 이가 유진 벨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공신력을 준다. 조선 사기 책을 만들면서 총회에서는 특정 몇 사람에게만 맡긴 게 아니라 전국의 각 노회별로 준비해서 보고한 내용을 기초로 하여 진행하였다. 전남 편의 당시 모든 교회를 기술하면서는 전남노회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자료로 편찬한 것이다.

총회 사기의 전남 편은 전남노회에서 구성한 4인의 편집위원들이 수고하였다. 1918년 강진 병영교회에서 회집한 제 2회 전남노회에서는 총회 사기 전남노회 수집위원으로 유진 벨, 프레스톤, 이기풍, 변창연을 선정하였다. 당시 전남지역의 최초 일군을 중심으로 선정된 이들이 전남의 모든 교회 역사 기록을 모아 총회에 보고하고 사기에 실리도록 한 것이다. 목포와 전남의 최초 선교사이며 일군인 유진 벨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서 만들었을 이 보고서에 목포교회를 기록하면서 당연히 유진 벨은 자신의 기억을 제대로 살려 1898년으로 정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목포교회에서 지켜 오는 1897년 3월 5일은 여러 가지로 맞지 않다. 그에 비해 유진 벨 자신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고증들을 정확한 근거로 하여, 이제 목포교회는 1898년 5월 15일로 고쳐서 설립일을 지킬 일이다.

그동안 잘못 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제대로 알고 고쳐야 한다. 고쳐야 하는 부담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이제라도 바로 해야 한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일을 알면서 무시하거나 뭉개버리는 게 더 부끄럽고 옳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고쳐 후손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은혜를 전해야 하는 것은, 오늘 우리의 마땅한 책임이요 용기다. 여리고 물 근원을 고쳤듯이, 오늘 우리 목포와 교회도 역사도 물 근원을 제대로 고치는 정직과 용기가 일어서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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