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벨은 1897년 봄이 되자 나주에 내려가 선교를 개시했다. 이때만 해도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나주를 처음으로 결정하고 시도하려 한 경과는 이렇다. 전북의 전주와 군산에 이어 전남 지역에도 스테이션을 세울 계획이었던 선교부는 목포, 나주, 좌수영(여수) 세 곳을 후보지로 조사하여 왔다. 그런데 1896년 11월 초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목포는 개항이 미뤄지고 있었고, 좌수영은 너무 교통이 불편해서 결국 당시만 해도 가장 인구가 많고 큰 지역인 나주로 임시 결정하였다. 선교부는 11월 18일부터 12월 18일까지 한 달간 군산을 거쳐 정읍과 광주, 그리고 나주 일대를 답사하고 나주를 최종적으로 확정하였으며 그 책임자를 유진 벨 선교사로 하였다.
1897년 초 겨울을 서울 집에서 보내고 따뜻한 3월이 되자 유진 벨은 나주 선교부 개설을 위해 서울을 출발했다. 3월 5일 금요일 점심을 먹고 오후 12시 반쯤 조사 변창연과 요리사를 대동하고 집을 나섰다. 저녁 늦게 제물포에 닿아 하루 숙박한 후 토요일인 6일 아침에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그만 배를 놓치고 말았다. 일행은 별수 없이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이번에도 또 순조롭지 못하는 건가? 멀리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하늘 충성을 다하려는 유진 벨이 일을 새롭게 추진하는 첫 발자욱을 뗄 때마다 번번이 틀어지곤 한다. 1895년 강경 지방에 처음 지방 출장 갈 때는 설사하며 복통에 시달리고 1896년 목포에 가는 도중엔 폭풍에 뱃멀미도 심하게 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사탄의 심술은 예외가 없다. 벨은 주일을 서울에서 보내고 다시 심기일전하여 도전하고 또 나섰다.
3월 8일 월요일 일행은 다시 전라도 나주를 향했다. 이번에 아예 말을 타고 육로로 가기로 했다. 세 필의 조랑말을 얻어 하나는 벨이 타고 하나는 식량과 책 등 짐을 가득 싣고 하나는 조사와 조리사가 번갈아 이용했다. 당시로선 조랑말을 이용하자면 서울에서 나주까지 일주일 이상 걸리는 여정이었다.
벨 일행은 3월 중순경 나주에 도착하였다. 이미 지난해 연말에 한 번 왔던 곳이었다. 이제 비로소 자신의 사역지가 되고 이곳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기독교를 개척해야 하는 사명과 포부에 그는 한껏 사기 충만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리라. 변창연 조사의 도움을 얻어 그곳에 집을 구하고 거주와 사역이 용이하도록 집을 개조하며 나주 일대에 대한 조사와 적응에 하루하루를 힘있게 보냈다.
의욕을 가지고 나주에서 사역을 전개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주 현지인들은 호기심을 넘어 갖은 의혹과 저항감을 드러냈다. 외국인이 함께 살면서 끼칠 안 좋은 영향들이 그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한국 여인들이 빨래도 하는 냇가에 나타나 이방 남자가 옷을 벗고 목욕할 수도 있고, 벨 선교사가 아내를 놔두고 혼자 와서 지내는 것 등이 마뜩잖았다. 이런 상황에서 벨은 쉽게 주민들과 접촉하며 이야기하기도 어려웠고 복음을 전하는 건 더더욱 반발심만 키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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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스(피득) 선교사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1897년 나주와 전남에서 권서인으로 사역하였으며 우리나라 구약 성경 번역에 헌신하였다. |
나주에서 만난 권서인 피터스
나주에서의 사역이 지체되고 저항에 쌓였지만, 유진 벨은 생각지도 않게 이곳에서 복음 전도 활동을 하고 있는 다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미국 성서공회 소속의 권서인 피터스였다.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피득)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20대에 고향을 떠나 일본을 여행하던 중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일본 주재 미국 성서공회 루미스 총무의 파송에 따라 1895년 조선에 왔으며 3년 만인 1898년 시편 중 62개 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시편촬요”를 내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이다.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매코믹 신학교를 1902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북장로교 선교사로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 다시 파송되었다. 재차 한국에 선교사로 온 피터스는 재령 선천 등 이북지역에서 목회에 전념하였는데,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기에 1930년대에는 성경 개역위원회에서 구약 개정작업에 주로 활약하여 1938년 한글 개역성경 편찬에 크게 기여하였다.
피터스는 처음 한국에 권서인으로 일하면서 1896년에 이어 1897년에도 전라도에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유진 벨이 1897년 3월 나주에 내려갈 때 이곳에서 피터즈를 만났는데, 아마 얼마 전 유진 벨이 제물포에서 배를 놓쳤지만, 피터스는 이 배를 타고 먼저 전라남도로 내려갔던 것 같다. 목포에 도착하여 목포에서부터 나주를 거쳐 순천과 구례 등지를 여행하며 권서 활동을 펼쳤다.
피터스는 계속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권서 활동을 해야 했으므로 유진 벨과의 만남은 아주 짧았다. 피터스가 떠난 나주에서 유진 벨은 어찌하든지 정착하며 선교 터전을 일궈야 했다. 1주일에서 열흘 남짓 나주에서 씨름을 벌였는데 별 소득 없이 일단은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4월 초에 돌아와 한 달 정도 쉼과 재충전을 한 끝에 5월 3일 다시 나주로 향했다.
나주 선교 2차 시도는 절친 선배 해리슨이 동행하였다. 해리슨은 전주 사역에 합류하는 즈음이었는데, 나주 정탐에 힘을 모으기 위해 함께 하였다. 이번에는 작은 부지를 구입하기도 했지만, 역시 이 터 위에 집을 지으려고 할 때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 이번에도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후퇴해야 했다. 실망이 컸지만, 유진 벨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6월 그의 편지에 드러나듯 가을에 의사 선교사가 오기로 예정되어 있으니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늦가을에는 나주로 가족 전체가 이사할 것이고 선교에 나서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미 구입한 집과 땅 외에 더 좋은 부지를 매입하려는 의지도 갖고 있었다.
서울에서 재기를 모색하면서 유진 벨은 레널즈의 인성부재 교회를 돕기도 하고, 7, 8월 여름에는 부산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하였다. 무더위가 잦아들자 세 번째 나주 선교에 나섰다. 이번에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까지 간 후 목포에서 돛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9월 2일 나주에 도착하였다.
이번엔 전에 구입해 둔 초가집을 고치고 증축하는 일을 하려 했는데, 미리 보낸 목재는 도착하지 않았고 목수들과 상대하는 것도 어려웠다. 나름 설계도를 그려가며 사택 공사에 나섰지만, 목수들과의 임금 협상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이번엔 집도 수리하고 증축도 결국에는 성공적으로 치렀다. 제발 나주 사람들이 자신을 반겨주고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면 참 좋겠는데, 그러면 힘을 내어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갈 수 있으련만! 좀처럼 열리지 않는 나주 선교? 어찌해야 하나, 무슨 돌파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