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참 신(神)이심을 믿는 기독교 신앙 고백이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는 신경(信經)으로서 아버지 하나님(聖父)에 대한 고백 다음에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성자(聖子) 하나님을 고백한다. 이 고백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구속사역으로 강조하기 위한 이 부분에서 동사의 활용을 두드러지게 특정지우고 있다. 즉 잉태되고, 나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등등.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반 인간과 다르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하늘에서 시작하여 다시 하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삶은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하늘에 영원한 거처를 두신 하나님 자신의 삶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둘째 고백은 성자의 호칭(주, 예수, 그리스도, 유일하신 아들)과 성자의 전 역사(Prehistory)를 다루고 있다.
청년 시절에 읽은 <쿠오바디스, Quo Vadis Domine>라는 소설을 보면,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네로 황제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감시의 눈을 피하여 서로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암호로 땅에다가 ‘물고기’를 그려보이고는 곧장 지워버리는 장면이 여러 번 묘사된다. ‘물고기’가 예수 믿는다는 암호가 된 것은 기묘하게도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익뒤스(ἰχθύς)’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알파벳이 다섯 개의 중요한 낱말인 ‘예수(′Ιησοũς)’, ‘그리스도(Χριστός)’, ‘하나님(Θεός)’, ‘아들(υίός)’, ‘구주(σωτήρ)’의 머릿글자(Initial)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고백하는 내용이 ‘물고기’라는 헬라어 낱말 하나에 함축적으로 상징되어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거니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암호’(비밀 표시, Symbol)로 ‘물고기’를 그렸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렇다, 이 호칭들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신앙 고백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신앙 고백에 나타난 네 가지 호칭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 앞서 ‘우리’라는 낱말이 갖는 중요한 뜻을 살펴본다. 기독교는 ‘나’ 한 사람의 개인 구원이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종교가 아님을 성경은 일관되게 변증하고 있다. 타 종교가 개인 ‘한 사람’에게 치중한다면 기독교는 언제나 ‘우리’라는 개념이 ‘나’ 개인을 앞선다.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나’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 ‘우리’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가정의 한 식구가 되는 것으로서 공동체적 신앙 안에서 성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고백한 신경(信經)이다. 그래서 이 고백에서 ‘내’가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기독교는 한 개인의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가 아니라 사도들의 공동 체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는 바, 그 증거로 열두 제자 가운데 열한 제자가 모두 순교할 만큼 공통적으로 확실한 신앙을 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한 사람에게 치중하여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즉 ‘나’ 하나밖에 없다, 이 세상 “나에게는 사랑할 이웃이 없다”는 열반(涅槃)의 세계관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기독교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마 22:37-40)임에도 4세기 이집트의 파코미우스(Pachomius, 290?-346)에 의한 수도원 운동은 사막에서의 은둔 수도사들을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지게 만듦으로써 기독교의 경건 추구에서 자기 학대와 자기 공로만 앞 세울 뿐 ‘이웃 사랑’이라는 성경의 대강령을 버리고 말았다. 한 마디로 “사막에는 이웃이 없었다”였다. 오늘날의 개인주의, 이기주의도 대동소이한 반예수적 세계관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이 가르쳐 주는 바 “우리”의 이 고백은 그 자체가 사도적이요 교회적이다. 왜냐 하면 공동체적 체험에 근거해서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세워졌고, 그 체험에 근거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호칭의 첫 번째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다. 옛 신경에는 ‘외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이 호칭 또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헬라어 ‘모노게네스(μὸνογενής)’는 ‘유일한, 모노스(μὸνος)’와 ‘종류, 게노스(γενής)’의 합성어로서 출생을 뜻하기 보다는 유래(Derivation)를 의미한다. 그런데 똑같은 단어를 요한복음 3장 16절은 ‘독생자’, 누가복음 7장 12절은 ‘독자’, 히브리서 11장 17절은 ‘외아들’로 번역하는 등 다양한 표현이 나타나는 바 원어상 중요한 뜻인 유일성(Only)과 독특성(Unique)을 감안할 때 ‘모노게네스’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타인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하다’는 뜻에서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호칭이 옳다. 이렇게 볼 때 영어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의 “the only Son(요 3:16)”의 직역에는 원어 해석 상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 3항이 성령 및 동정녀 마리아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언급하겠다. 한 마디로 우리 말의 ‘독생자’, ‘독자’, ‘외아들’ 그 어느 것도 우리 말 「사도신경」에 해당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외아들”은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고백함이 옳다.
두 번째는 ‘주(主)’이다. ‘주(主)’의 헬라어 ‘퀴리오스(Κὺριος)’는 일반적으로 노예가 주인을 향해서, 백성이 왕을 향해서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그러나 성경적 의미로 ‘주’는 ① 절대 충성을 고백한다는 의미에서 쓰인다. 고백하는 우리는 ‘종’이고 그리스도는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절대 충성을 고백하여 ‘주’라고 부른다. ②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소유주 되심을 의미한다. 주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세계를 통치하신다. 교회의 머리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LORD)’라 고백한다. ③ 구주되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과 함께 ‘구속(救贖)’이라는 말도 쓴다. 노예를 돈주고 산다는 뜻이며, 이에 지불한 돈을 ‘속전(贖錢)’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피로써 대신 치루시고(代贖) 우리를 사셨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라 고백하는 것은,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④ 신성(神性)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시험하는 사탄을 향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7)하시고 물리치셨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의 인용어로서 동일한 호칭이 구약은 ‘여호와’로, 신약은 ‘주’로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라는 호칭을 극히 절제했다. 예를 들어 쓰기는 ‘여호와’라고 쓰고 읽기는 ‘주(아도나이, Adonai)’로 읽는다. 그만큼 경건한 선민이었으므로 이방 사람들이 읽도록 성경을 번역할 때에도 ‘여호와’라고 읽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뜻에서 여호와를 ‘아도나이’, ‘퀴리오스’로 고쳐 번역하였다. 그런 영향으로 영어 성경도 ‘주’를 대문자 ‘LORD’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하나님되심을 고백함이며, 이 신앙 고백과 함께 절대 충성을 다짐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예수’이다. ‘예수’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이다. 통상 부모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서 출생 전에 미리 친히 계시로 지어주신 독특한 이름이다. 동정녀 마리아와 약혼 관계에 있던 요셉에게 주님의 사자가 현몽하기를 “그(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0b-21)는 말씀이 그 증거이다. ‘예수(Ίησοὺς, 예수스)’는 구약 성경 ‘여호수아’의 음역(音譯)이다. 이 ‘여호수아’는 ‘호세아(구원)’에 하나님을 뜻하는 ‘여/야’를 붙여 “여호와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 이름이 뜻하는 바 대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 ‘예수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여기 ‘구원(σωτηρία, 소테리아)’이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의 회복과 온전하게 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자”, 즉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또한 ‘백성(λαος, 라오스)’은 새롭게 선택될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며(행 13:48), 우리를 구원하여 예수님의 백성을 만드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요 3:16) 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 그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아’로서 그 어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가운데 “기름 부음”을 받아 일정한 직임에 봉사하던 이들은 ‘제사장’(출 28:41, 40:15; 레 8:10-13), ‘선지자’(왕상 19:16; 시 105:15), ‘왕’(삼상 24:6; 왕상 19:16; 시 2:2, 18:50, 20:6) 등 세 직분자들이었다. 이 구약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제사장, 선지자, 왕은 장차 오실 진정한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모형(Type)이었으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성취되었다. “오늘날 …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이 땅에 오셔서 “기름 부음 바 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친히 유일한 희생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셨고(히 9:26, 10:12-14), “옛적에 선지자를 통하여 … 말씀하신 하나님이 …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곧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뿐만 아니라, 천상에 계시는 지금도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속(救贖)에 관한 비밀스러운 경륜과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신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지자요 교사이시며, 나아가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이시다(마 2:2, 27:11; 요 18:37). 따라서 메시아, 그 분이야 말로 자신의 사역으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심문하는 빌라도 총독이 “당신이 왕이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리스도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노라”(요 18:37)고 당당하게 확증시켜 주신 것이다. 필자는 2천 년 전 빌라도 법정에서 당신이 메시아, 곧 왕이심을 밝히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겸손하게 영혼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시요, ‘구속자’이시며, 지고한 ‘왕’이시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분께서는 여전히 무궁한 사랑으로 택하신 나(백성)를 계시된 하늘의 뜻을 따라 구속(救贖)과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크신 은혜에 감격하여 찬송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참으로 이 죄인 이렇게 은혜로 고백하며 살다가 참회로 변화된 맑은 영혼으로 눈을 감고 싶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