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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Credo), “나는 믿습니다.”Ⅰ -이성재 목사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때, 과연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어떤 자세로, 그리고 무엇으로, 어떻게 응답할까? 그 해답이 바로 이들의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교회」는 근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직면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신앙 고백이 은밀한 곳에서 감추어진 채 고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차적으로는 주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되어졌다는 점에서 신앙 고백과 교회 공동체와의 관련성은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앙 고백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그 고백을 공유하는 신앙 공동체와 동일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0장 32,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대부분의 중요한 신앙 고백의 장면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음을 본다. 한 예로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에서 예수님은 여인의 은밀한 접촉 후에 공개적인 신앙 고백을 요구하신 장면을 누가복음 8장 42절은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신앙 고백의 핵심은 무엇일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의 고백(마16:16)에서 드러났듯이 예수님은 ① 주(LORD)가 되시고, ② 그리스도(Messiah)이시며, ③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다라는 기본적인 신앙 고백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소개하는 개별적 신앙 고백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2절의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교리를 고백하게 되었으며, 결국 복음의 가장 정확한 요약으로 평가 받는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의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는 형식으로 진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곧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의 핵심 주제인 예수는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가가 신앙 고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서 기독교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Doctrine)를 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이 신앙 고백은 공개적 성격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측면이 강조되는 죄의 고백과 송영(Doxology)에 초점을 둔 신앙 고백(confession)의 유형이고, 두 번째는 세례 시 신앙 고백의 성격으로 교회 공동체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특성(symbol)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교리와 신앙 수호적 성격이 강조된 세속과 이단 앞에서의 신앙 고백(Doctrine)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초대 교회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이다. 당시 원시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Ecclesia)는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유대교와의 심각한 차별성에 따른 갈등 관계였다. 이미 성경은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서 맹인된 자를 고쳐주신 기사 말미에 “예수를 그리스도(구속자)로 시인한 자는 (유대교에서)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22절)는 기사에서 눈을 뜬 아들의 기쁨보다는 유대 사회에서 매장될 수 밖에 없는 종교적, 사회적 풍토에 그 부모가 갖는 두려움의 반응이 이를 말해 준다.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일은 유대교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야기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42절과 16장 2절의 사건도 동일한 문제였다. 하지만 유대교와의 종교적 갈등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끝날 것이라는 유대교도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기득권 세력들의 모진 박해를 이겨낸 기독교 「교회」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 세계로 펼쳐 나아갔으며, 드디어 유대교와는 다른 새로운 지평을 열어 당시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과 당대 정신 세계를 지배했던 헬라 사상(Hellenism)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위대한 신앙을 담대히 고백하였기 때문이다(롬 10:9-13; 딤전 6:12).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왜 「사도신경」(使徒信經)인가? 이 신경에 대한 원래의 명칭은 라틴어 ‘크레도’(Credo), 즉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되는 첫 글자였으며, 오늘날 영어 명칭인 Apostle′s creed가 유래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신경으로는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사도신경, 그리고 사도신경의 원형인 로마 신경이 있다. 사실 기독교의 세 분파(로마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회)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보편적인 신경은 니케아 신경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영향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2세기 경 형성되어 공식화되었고, 9세기 칼 대제 이후 교회가 예배에 도입함으로써 전통화되었으며, 루터와 칼뱅 역시 종교개혁 때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초대 교회로부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되는 세례식에서, 세례 베푸는 사도(집례자)가 수세자에게 “예수는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으로서 이에 응답하고 반드시 믿고 고백해야만 했던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문서가 바로 「사도신경」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이 진리를 고백했기에 이 진리를 함께 고백하는 이들을 우리는 ‘가톨릭’(Catholic), 곧 ‘보편적 몸’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가장 반듯하게 알려 주는 고백이 바로 「사도신경」인 것이다. 참고적으로 천주교를 가리킬 때에는 반드시 로마+가톨릭교회, 즉 로마가톨릭교로 표기하여 구분한다. 이 「사도신경」의 구조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예언의 성취인 성육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생을 길게 언급하는 한편,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매우 짧게 소략(疏略)하고 있다. 이는 초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신격(神格)과 인격(人格)에 관한 문제가 가장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교회에는 두 가지 사도신경이 병용되고 있다. 어떤 것이 원문에 가까울까? 우선 ‘전능하신 아버지’의 뜻을 살펴보자. (옛)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새)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얼핏 비슷한 문장인 듯 하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된다. 결론적으로 새 번역 「사도신경」이 라틴어 버전에 더 정확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옛 번역은 “전능하사”가 “천지를 만드신”에 연결되어 있고, 새 번역은 “전능하신”이 “하나님 아버지”에 연결되어 있다. 옛 번역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만드셨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전능이 ‘창조 사역’과 연관되었고, 새 번역은 ‘전능하신 아버지’, 곧 하나님의 전능이 그분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되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사도신경 해설」에서 “‘전능하신’이라는 개념이 ‘아버지’라는 개념으로부터 그 빛을 받으며……신적인 능력의 행동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의 계시이다”라고 해석(解釋)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할 때, 이 “전능”을 옛 번역으로 고백하면 ‘하나님의 전능’이 비인격체인 ‘창조 사역’과 연결될 뿐, 신앙을 고백하는 ‘나’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분이 되고 만다. 단지 객관적으로 뛰어난, 그리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신(神)이 될 뿐이다. 그러나 원문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과 연결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시니’ 그의 자녀들인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의미의 선언이 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그야말로 자신의 유일하신 아들까지도 우리 인류에게 주시는 대속(代贖)의 은혜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을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가 땅의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11). 과연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까지도 우리에게 주시는 데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비할 데 없이 무궁하다.


그러므로 성도가 우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단지 ‘과업’을 이루셨다는 경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은 ‘나’(자녀)를 위하여 세상을 지으셨고, ‘나’(자녀)를 위하여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확신을 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창조’라고 하고, 창조된 세상을 돌보고 계시는 것을 ‘섭리’(management)라고 할 때, ‘창조’, 그리고 ‘섭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이 세상 속에 드러나게 되는 방식임을 함의(含意)한다. 사도행전 17장 28절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생명), 기동하며(활동), 존재하느니라(존재)”는 말씀을 묵상해 보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하나님을 힘입어 “활동하며”, 하나님을 힘입어 “존재”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여전히 세상을 ‘섭리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성도는 마땅히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 ‘우리의 아버지를’, 그분의 ‘친절하신 손길을 발견’ 한다. ‘창조’하신 주님께서 지금 나의 삶도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인격적으로 고백되어지는 감격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에게만 오직 나의 모든 의미가 존재한다라는 고백이다. 이처럼 단어 하나 하나에 숨겨진 놀라운 복음의 정수(精髓)인 「사도신경」을 집중하여 고백함이 은혜이다.
그동안 우리는 이 위대한 신앙 고백을 ‘화석화’시켜 ‘내 삶과 그다지 관계없이’ 습관적으로 허울 뿐인 주문(呪文)처럼 흥얼거리고 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필자는 새 번역 「사도신경」을 두 눈 부릅뜨고 감사 감격하며 고백한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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