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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권총 차고 불침번 서다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유진 벨은 조선에 와서 야심차게 처음 지방(충남 강경) 출장 사역을 펼쳤는데, 설사병에 시달리는 바람에 제대로 일도 못해보고 서울로 돌아왔다. 애초엔 두 달 정도 계획한 일이었는데 그만 2주 만에 돌아왔으니 상당히 멋쩍었으리라. 그런데 설사병도 아물어 가고 다시 포근한 집에 돌아온 것은 좋았는데, 유진 벨 선교사는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알게 되었고, 이 일에 새롭게 끼어드는 일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그 직전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무장을 하고 경복궁에 무단 침입하여 고종의 왕후인 중전 민씨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근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기름을 부어 불태워 버리기까지 하였다.

일본 공사 미우라 등을 앞세워 치밀하게 오래도록 조선 침략을 준비해 오던 일본제국이 저지른 만행이요 국가적 범죄였지만, 그 진상을 제대로 진상 규명하지도 못했고 외교적 사법적으로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다. 일본 제국은 사건 자료를 없애고 왜곡하며 증거불충분으로 모든 걸 덮어 버렸다. 전혀 뜻밖의 사태에 너무 놀란 고종 왕은 사건의 진상과 대책에 조선의 정부와 국력으로 일본에 대항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도 위험에 처했음을 먼저 걱정해야 했고 몹시 두려움에 떨었다.

급기야 그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청과 러시아 등도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혈안이 되어 있고 조선 관리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친일, 친러, 친중 등으로 갈려있는 판국에 고종은 자신의 신복이나 군대도 믿을 수 없어 그나마 미국과 선교사들이 가장 낫다고 판단했다.

고종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이를 부탁했고, 언더우드는 자신의 후배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고종의 신변을 지켜주기로 했다. 자신을 포함해 미북장로교의 헐버트, 에비슨, 그리고 미남장로교의 유진 벨 등이 불려 나갔다.

1895년 10월 22일부터 1896년 1월까지 3개월 동안 매일 밤마다 선교사들이 2인 1조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권총을 차고서 말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해서 조선의 궁궐에서 발생한 사건 소식을 듣고 엄청 놀랐습니다. 내가 지방에 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지요. 미국 집에서도 신문을 통해 이 일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곳 조선보다는 미국에서 이런 소식을 더 잘 알 테니까요. 일본 사람들이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과 군인들을 살해했습니다. 왕은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데, 저희 선교사들도 두 명씩 밤마다 궁궐에 들어가 왕을 지킵니다. 왕의 한 아들은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숨었고,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유진 벨, 1895년 10월 14일).

고종의 안전한 식사를 위해서는 언더우드와 아내인 릴리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또한 나섰다. 릴리어스 부인이 직접 싼 안전한 도시락을 금고에 넣어 자물쇠로 잠근 다음 고종에게 배달되었고, 그 열쇠는 언더우드가 직접 왕에게 건넸다.

수인(囚人)이 되다시피 한 왕은 궁궐에서 준비되는 모든 음식을 의심했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과 언더우드의 집에서 번갈아 가며 음식을 가져갔다. 그 음식은 주석 금고에 넣어 예일(Yale)제 자물쇠로 잠근 다음, 열쇠는 언더우드가 직접 왕에게 건네 드렸다. 또한 매일 밤 두 명의 외국인이 왕 곁에 남아 왕을 지켰다. 왜냐하면 이렇게 목격자가 있으면 왕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 선교사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도 자주 한밤중에 경계를 섰다(릴리어스 언더우드,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171쪽.)



릴리어스 언더우드 : 1888년 의사 선교사로 내한, 이듬해 1889년 38살 노처녀는 그보다 8살 연하인 노총각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 자녀와 손자 대에 이르는 한국 선교의 어버이로 충성하였다.



정치적 격변 와중에 선교사의 행보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에는 춘생문 사건이 발생했다. 친일파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궐에서 고종을 궁 밖으로 피신시킨 후 군사들을 동원하여 친일 정권을 타도하려는 것이었는데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28일 친미, 친러 세력, 그리고 고종 친위대 군사들이 합작하여 벌인 쿠데타였다. 경복궁 북동쪽에 있는 춘생문을 통해 일시에 경복궁에 들어가려 했는데, 사전 밀고자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등이 조선의 내외정에 계획하고 개입된 사건이었음에도 1차는 불발이었지만, 결국 이듬해 1896년 2월 11일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대피시키는 아관파천이 이뤄졌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을 등에 업은 친일 내각은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렇잖아도 국모 시해로 반일감정이 일어서던 백성들은 급기야 단발령까지 시행하자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를 일으켰다. 친일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군대를 이용하여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기대에 못 미치자,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과 궁궐 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틈에 친러파 세력들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러시아는 인천에 있던 러시아 수군 부대를 무장하여 2월 10일 서울로 불러들여 주둔시키고 다음날 새벽에 왕궁에 들어가 왕과 왕세자 등을 호위하고 경복궁 영추문을 통해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한 것이다. 이 일로 김홍집 친일 내각은 무너지고 친미, 친러 내각이 세워졌다. 무능한 고종과 흥선대원군, 민비 등 왕족들끼리 갈등과 다툼 벌이며 외세에 의존하여 나라보다는 개인의 안위와 권력욕에 집착했던 타락한 관료 틈새에서 조선의 운명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던 고종이 일개 외국대사관에 피신하며 정치적 망명을 해야 하는 지금으로부터 1세기도 더한 당시의 조선은 이토록 주권이 훼손된 비참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과연 당대의 선교사들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역만리 태평양 건너 조선까지 찾아와 하늘 생명과 소망을 심어주려 한 선교사들은 자기 고향에서 가졌던 선교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낭만에서 상당한 혼동과 고민이 깊었으리라. 너무 비상식적이고 엉터리 같은 조선의 정치 현실, 엄혹한 조선 사회 밑바닥의 현장을 살 떨리듯 겪으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적 선교적 관점과 상황적 접근 등에 대한 물음과 기도가 절로 나왔으리라. 조선에 와서 선교나 교회를 앞세우기 전에 유진 벨이 먼저 황급히 당하고 느껴야 했을 충격적 상황, 선교사 신분임에도 권총을 차고 불침번 서야하는 노릇을 애써 공감하며 오늘 우리의 시대 상황과 교회 현실에 맞닥뜨리며 가져야 할 선교와 하늘 충성에 대한 마음을 재장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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