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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첫 술에 배부르랴!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1895년 9월 13일과 14일 양일 간에 걸쳐 미남장로교조선선교부 연례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지금의 노회와 같은 성격의 선교사 연례회의는 1892년 11월 서울에 처음 온 이후 이제 4번째다. 회의는 이번 가을에 전라도 지역을 선교 답사하기로 결정하고 그 대상은 군산과 전주 그리고 강경 일대였다.



이미 2년 전인 1893년 1월에 조선에 들어와 있던 해외 선교회 대표자들이 모인 선교공의회에서 서로 지역을 겹치지 않고 분할하여 사역하자는 예양협정에 따라 미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제주도, 그리고 충청 남부 지역을 배정받았었다. 배정된 지역에 대한 사전 답사차 전라도의 관문인 군산과 전라도 수부인 전주, 그리고 충청 지역의 강경 일대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들 지역은 그동안 몇 차례 다녀가기도 했다. 첫 탐사는 레널즈가 했다. 1892년 12월 조선에 온 지 한 달 만에 마펫 선교사와 함께 공주와 전주를 11일간 방문하였다. 이때는 예양협정을 맺기 전이어서 아직 구역 배당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또 자신보다 2년 먼저 조선에 온 선배이며 북장로교 소속인 마포삼열과 교제를 나눌 겸 함께 답사한 일이었다.



두 번째는 1893년 6월 미남장로교가 얻은 첫 조선인 신자이며 조사인 정해원을 전주에 파송한 일이었다. 외국인이 지방에 거주하거나 땅을 직접 매입할 수 없어서 조선인 정해원을 대리 정탐케 한 일이었다. 정해원은 서문밖 은송리에 주택 한 채와 대지를 52냥(26달러)에 구입하여 자신이 기거하면서 향후 선교사들이 들어와 일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세 번째 정탐 활동은 1893년 9월 전킨과 테이트가 나섰다. 충청도의 충주와 함께 전주를 찾았다. 전주는 지난 봄에 보냈던 정해원이 잘 준비하고 있는 지 살피고 격려하며 환대 속에 2주간 사역하였다.



네 번째는 1894년 3월 두 팀으로 나뉘어 이뤄졌다. 테이트 남매 선교사들은 전주에서 6주간 머물며 전도 활동을 벌였고, 레널즈와 드루 또한 6주 동안 군산과 전주는 물론 목포와 순천에 이르기까지 전라남북도 전체를 돌아보며 여타 선교 후보지를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1895년 가을 유진 벨이 새롭게 합류하며 또다시 답사 및 기존의 전주 군산 정착을 모색하는 여행이 이뤄졌다. 이미 모색되었던 군산은 전킨과 드루, 전주는 테이트에게 맡겨졌으므로 이들은 보다 진전된 정착과 기지 설치의 임무가 주어졌고, 처음 지방 탐사를 나선 유진 벨에게는 강경지역이 주어졌다. 충청지역 선교후보지로 염두에 두고 강경 답사를 맡긴 것인데, 실상은 아직 조선어가 충분히 익숙지 않은 유진 벨에게는 언어 현장학습이 더 큰 과제였다.



1895년 관악산 삼막사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여름에 발생한 서울의 콜레라 방역활동에도 참여하였던 미남장로교조선선교회는 9월이 되어 다시 서울 시내로 하산하였고, 4번째 연례회의를 가졌다. 그리고 회의 결정에 따라 9월 26일 목요일 전킨과 드루, 테이트와 벨 4사람이 서울을 출발하여 군산으로 향하였다. 



1893년 6월 정해원 조사가 서울에서 파송되어 전주 은송리에 마련한 초가집이 기초가 되어 지금의 전주서문교회로 발전하였다.




강경에서 호된 신고식을

남자 선교사 가운데 레널즈를 제외한 4명의 일행은 제물포에 도착하여 배편을 기다리며 머문 다음 28일 오전 출발하여 29일 일요일에 군산에 도착하였다. 이곳에 숙소를 얻어 유진 벨은 전라도에서의 첫 날을 보내는 데 그의 편지에는 대체로 불평과 아쉬움이 많이 섞여있다.



일행이 묵은 숙소부터가 아주 형편없었나 보다. 벨은 마치 자기 고향의 대다수 흑인들의 오두막집보다 훨씬 못하다고 혹평하였다. 키 큰 서양인인 그들에게 방은 너무 비좁았다. 다른 한국인 나그네들과 달리 그들만의 방을 따로 얻을 수 있었지만, 집 주인이고 다른 손님들이고 심지어 그 집 아이들까지 외국인을 엿보러 수시로 드나드는 통에 불편하였다. 게다가 저녁에 잠을 자는 데 온갖 벌레들이 수면을 방해하였다.



그나마 괜찮은 것은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벨은 운이 좋아서 군산에서 양질의 귤과 계란에 더해 닭고기까지 잘 먹었다고 그의 편지에 남겼다. 두 끼를 드루와 함께 먹었는데 많이 먹고도 겨우 2센트만 냈다고 하였다. 숙소 환경도 그렇지만 낮에 여기 저기 살피려 시내를 다니는데 이번엔 몰려 들어오는 현지인들이 좋기도 하면서도 상당히 거북스럽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외국인에 대한 원주민들의 끊임없는 호기심일 것입니다. 그들은 떼를 지어 우리 주변에 몰려다니며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저희를 지켜봅니다. 구경꾼들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입고 있는 옷을 만져 보고 우리 머리카락도 손을 얹어 그 촉감을 느낍니다. 나는 그들에게 내 신발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내가 어떻게 신발을 신었는지 내 신발을 만져도 보게 하고, 내가 바지 속에는 무슨 속옷을 입고 있는 지까지 그들의 손으로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지닌 모든 물건을 일일이 살펴보고 또 우리가 쌀밥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을 알고 매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들의 호기심으로 귀찮게 하는 일이 며칠은 괜찮은데, 오래되면 저희도 성가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러지 못하도록 거부하는데, 그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진 벨, 1895년 10월 14일)



그가 서울에 도착한 조선에서의 첫 인상도 그랬겠지만, 서울보다 훨씬 더 못했을 지방의 풍경과 모습들은 더더욱 곤란하고 거북스럽기만 했으리라.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며 의욕 있게 선교에 도전하고 충성하려 했는데, 막상 머나 먼 타향, 물설고 몸과 마음 겪어본 적 없는 생소함과 낯설음의 첫 충격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이틀 후 10월 1일 화요일 오전에 이제 군산에서 강경으로 가려는 데 뜬금없이 조리사 소년이 못하겠다고 떠나 버렸다. 임금이 작다는 이유였다. 일하기 싫다고 바울을 떠나 버린 데마가 따로 없다. 별 수 없이 벨은 어학선생과만 금강을 거슬러 강경으로 갔다. 거기서 한 달 쯤 지내며 현지인들을 직접 대하며 언어 훈련을 실제적으로 쌓기도 하고 성경 배포와 전도를 해보려 했는데, 이번엔 설사에 걸리는 바람에 또다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마도 위생이 잘 안된 물과 식사를 하다 생긴 병이었으리라. 별 수 없이 벨은 군산으로 와 의사 드루로부터 약 처방을 받으며 치료를 받고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혼자 서울로 쓸쓸히 돌아와야 했다.



조선에 와서 6개월 여 적응하며 지내다 이제 처음으로 지방에도 다니며 의욕 있게 새 일을 수행하려 했는데, 제 몸부터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서울로 복귀해야 했으니, 얼마나 아쉬웠으랴. 사람 때문에 잘 풀리지 못한 일들이 겹쳐 야속하고 멋쩍었던 첫 정탐여행, 다시 회복하고 추스르며 다음 미션을 다시 장전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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