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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콜레라 방역에 나선 유진 벨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엄청난 위기에 놓이고 많은 사망자와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2019년 11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폐렴 질병은 두 달 후 2020년 1월 아시아에 퍼졌고, 3개월 후인 2월에는 전 세계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비드 19)은 치명적 살상력을 가져서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천문학적인 재정이 소요되었다. 확산을 줄이고 서로 조심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예방주사를 3-4회씩이나 맞았고 마스크를 다 쓰고 다녀야 했으며 비대면 전환 등으로 일상생활에 상당한 제약과 협력이 절실했다.



어느덧 3년이 지나며 최근엔 많이 잦아드는 듯하며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전환하려나 하는 상대적 호전이 보여 기대감도 커지고 감사도 일어서는데, 더더욱 개선되고 멈추고 소멸되기를 참으로 함께 기원해 본다.



인류는 살아오면서 늘 새롭게 대두하는 미생물 바이러스 세균 등으로 고통과 죽음의 지경에 처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었던 중세 유럽의 페스트(흑사병)로부터 시작해서 어느 대륙 어느 지역에서나 자주 인류를 위협하는 감염병은 되풀이되었다. 조선 말기인 지난 19세기 말에도 반복되는 질병이 되풀이되었는데, 그때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표적인 게 콜레라였다.



특별히 개항이 되고 외국인들이 국내에 빈번히 들어오게 되면서 자연히 콜레라도 원치 않게 수입되었다. 1895년 유진 벨이 처음 조선에 와서 한양에서 지내며 첫 휴가로 관악산에 머물 때도 콜레라가 서울 시내에 확산되어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했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평안도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전쟁의 피해와 함께 이들 외국군대에 의해 국내에 콜레라가 퍼졌다. 사람들은 콜레라를 괴질, 호열자, 쥐병 등으로 불렀다. 전혀 알기 어려운 질병이라 해서, 호랑이가 살점을 물어뜯는 듯한 고통을 준다 해서, 또 쥐가 다리 안쪽을 콕콕 찌르면서 기어 다니다가 가슴까지 올라온다고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다.



쥐에게 문제 있다고 해서 쥐의 넋에 기도하고 집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걸어 놓았을 정도이고, 어떤 이들은 부적을 대문에 붙이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게 어디 영적인 문제이고 귀신 문제이랴. 세균에 감염되고 전파되는 건 물리적인 문제이고 위생 환경을 개선해야 할 일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서양 의료 선교사들은 이를 지적하며 손을 씻고 음식을 끓여 먹으며 청결한 삶을 강조하였다. 조선 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방역위원회를 구성하며 그 책임과 전권을  서양 선교사들에게 맡겼다. 위원장에는 에비슨 의사가 선임되었다. 에비슨 선교사는 치료와 확산 방지를 위해 조선 민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걸게 하였다.



“콜레라는 세균에 의해 발병됩니다. 이 균이 우리 몸에 들어와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병을 일으킵니다. 이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음식을 반드시 끓이고 그 음식이 감염되기 전에 먹어야 합니다. 갓 끓인 숭늉을 마셔야 합니다. 찬물을 마실 때도 끓여서 깨끗한 병에 넣어 둬야 합니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과 입안을 깨끗하게 씻으십시오. 이를 준수하면 콜레라에 걸리지 않습니다.”(에비슨)





에비슨 의사가 박서양 의사와 함께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의 어의로 신분타파에도 힘쓴 에비슨

에비슨 선교사(Oliver R. Avison, 어비신, 1860~1956)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로 건너가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고 의사가 되어 내한 선교하였다.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3년 파송되어 1935년까지 42년간 한국 선교하며 의료 활동을 펼쳤다. 고종의 어의를 시작으로 제중원 원장,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의료인 에비슨은 조선의 신분 타파에도 앞장섰다. 어느 날 장티푸스에 걸린 박성춘을 치료하는데 그가 백정이란 것을 알았다. 에비슨은 왕의 주치의이면서도 그를 차별하지 않으며 치료하였고 왕과 조선 사회에 백정도 다른 사람과 평등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박서양에게 남들과 똑같은 공부의 기회를 주며 그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으로 한국인 세브란스 교수로 활동케 하였다.



조선에 온 지 2년만이던 1895년 콜레라가 발생하자 정부로부터 콜레라 방역 책임을 맡은 에비슨은 서울에 와 있던 선교사들에게 협력을 구하였다. 미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당시 선교부의 유일한 의사였던 드루 선교사와 전킨 목사, 그리고 신참 유진 벨이 협력에 힘썼다. 레널즈는 아내 팻시가 몸이 많이 아파 움직일 수 없었다. 조선에 4월에 와서 두 달여 서울 시내에서 어학훈련과 적응 훈련을 한 후 여름을 나기 위해 관악산 삼막사로 옮겨 휴양과 피서를 즐기던 유진 벨은 콜레라 방역 사역에 함께 하고자 무더운 여름날 서울 시내와 관악산을 자주 오가야 했다.



“서울에는 콜레라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보시듯 적든 많든 이 지역 전체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이 사람들의 [더럽게] 사는 모습을 보시게 된다면, 그들이 그러면서도 모두가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 진정 경이로울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국의 왕(고종)이 서울에 거주하는 의료 선교사들을 전부 불러서 어떻게 콜레라를 막을 수 있을 지에 대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콜레라 방지에 3,000불을 책정한 것 외에는 어떤 다른 결정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드루 의사는 이 콜레라가 저희들에겐 어떤 최소한의 위험도 없는 것으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방식 때문에 그렇게 콜레라에 쉽게 걸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유진벨, 1895년 7월 21일)



유진 벨 선교사는 드루 의사와 함께 서울 시내로 내려가 에비슨과 다른 선교사로 구성된 방역위원회에서 9일 정도 활동하였다. 서울에 있던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선교사들과 함께 콜레라 병원을 세우고 환자를 치료 간호하였다. 환자를 찾아 집집마다 방문하며 약도 주고 소독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선교사들 돕던 조선인 일군들도 피해가 컸는데, 레널즈의 하인이 사망하였고, 유진벨의 하인 가족이 사망하였다. 전킨의 어학선생은 콜레라에 걸렸지만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다. 1895년 초여름에 발생한 콜레라는 2개월 여 지나 8월 중순경 다행히 잦아들었다. 이제 갓 한국에 와서 겪은 또 다른 이 나라의 어려움과 실상을 지켜보고 그 현장에 뛰어 들며 유진 벨은 또 다른 선교 사명의 역할에 마음을 크게 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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