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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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명(鹿鳴)’은 사슴 록(鹿), 울 명(鳴)으로 ‘사슴의 울음’을 뜻한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먼저 목 놓아 운다고 해서 ‘녹명’이다. 즉 사슴이 제각각 먹이를 찾으려고 다니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다른 배고픈 동료 사슴들을 불러 먹이를 나누어 먹기 위해 내는 음소리를 ‘녹명’이라 한다.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사슴만이 먹이를 발견하면 함께 먹자고 통곡하는 음성으로 동료를 부른다고 하여 이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알려지고 있다. 여느 짐승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혼자 먹고자 경계를 늦추지 않을 뿐더러, 여우같은 경우 남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한데, 사슴은 오히려 울음소리를 높여 더불어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섭생(攝生)이야말로 비정한 세속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교훈한 바 크다 하겠다.
‘녹명’은 중국의 최고 시가집인 시경(詩經)에도 등장한다. 사슴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어온 사슴 떼가 푸른 풀밭을 누비며 평화롭게 풀을 뜯는 풍경을 어진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도모하는 선정(善政)을 비유적으로 읊은 시가 시경이다. 이렇듯 ‘녹명(鹿鳴)’은 ‘홀로’라는 이기심(egoist)을 나타내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라는 이타적(利他的, altruistic) 공동선(共同善)으로 불러낸다는 뜻을 가진 은유(隱喩, metaphor)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적 마음을 가진 사람을 성경은 “자비를 베푼 자”(눅 10:37a)라고 말씀한다. 여기 ‘자비(慈悲)’의 사전적 의미는 「(고통 받거나 어려운 일을 당한 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돌봄」을 말한다. 그러므로 ‘더불어’, ‘함께’ 하는 이타적인 <자비>는 깊고 넓은 신앙의 표현이요, 인격의 향기며, 성숙의 꽃이요, 사랑(愛情)의 열매이다. 그래서 장 칼뱅(Jean Calvin)은 “사랑은 혀끝에 있지 않고 손끝에 있다”라고 갈파하였다. 따라서 녹명과(鹿鳴科)의 마음이 장착된 성도는 삶의 최우선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고, 그 분을 따르고 행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그리스도와 함께 소외된 이웃과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자이다.
죽음을 이긴 능력보다 강한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평안(Shalom)이다. 잠깐 요한복음 13장을 펴고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있어 보자.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만찬 자리는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주님이 끝까지 사랑하심에도 끝까지 배신의 길을 간 가룟의 유다와 서로 높은 데 마음을 두고 권력욕에 따른 시기심으로 불편한 제자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성경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a). 또한 주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가야 할 길까지 제시하신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능력으로, 내 제자가 되라.” “사랑을 줌으로써 세상을 끝까지 구원하라.”
예수님은 지금 나(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분부하신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내 제자가 된 줄을 세상이 알게 하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이 예수님이 제시하신 참 길(진리, truth)을 깨닫고, 완전히 전환(회개, turning point)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새 역사 시점이었다(요16:13; 행2:2-4, 42). 예수님의 부활 이전까지 그들은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를 따르는 욕망의 인간군상(人間群像)이었다. 인생의 목적이 욕망을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제어하고 사랑으로 ‘주님의 뜻’(마7:26-27)을 이루는 데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신 것은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함에서 진정한 자아 실현의 첫 디딤돌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욕망을 ‘본성’(本性)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더 가지려는 욕심,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심, 더 편하게 살기 원하는 욕심, 혹은 오감(五感)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이 인간의 본성은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이기적 민낯이다. 이기심이라는 욕망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겨난 악습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이기적 욕망이 없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다른 피조물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거룩한 ‘본성’만 가지고 있었다. 욕망은 죄의 다른 이름이다. 성령 세례를 받고 본성을 회복한 열한 제자들은 온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순교자, martyrdom)의 길을 걸었다.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진리의 열정에 따른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욕망을 위해 하지 않았다. 식욕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입력해 주신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것을 잘 사용해야 건강을 도모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식탐(食貪)이 되면 필경 건강을 망친다. 식욕에 압도되지 않고 건강을 위해 절제하는 식습관이 중요하다. 시각도 마찬가지다. 미적 감각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좋은 도구지만, 시각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허영된 사치(luxury)로 인생을 망친다. 돈도 마찬가지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만큼’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기도할 때도 무심코 간구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분명 ‘함정’, 곧 속임수가 숨어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제자의 원심력에는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에 대한 분별력이 확연히 보였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말했다. “방치된 욕망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거부하지 않으면 필요가 된다.” 그렇다. 욕망을 내버려 두면 필요 이상의 물질을 누리는 습관이 생기고, 이 습관이 익숙해지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처럼 착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처럼 ‘필요한 만큼’은 아무런 통제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착각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신약 성경에 사마리아의 주술사 시몬이 등장한다(행8:9-24). 그는 스스로를 ‘큰 자’라고 높이며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안수 기도를 하자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다. 주술사 시몬은 자신도 성령을 내리는 능력을 받고 싶다고 하며, 그 능력을 돈 주고 사려고 했다.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행8:20)라고 저주한다. 그 시몬의 이름에서 성직 매매를 뜻하는 영어 단어 ‘simony’가 나왔다. 거짓 예연자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딤전6:10; 유1:11). 시몬은 성령을 능력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이미 능력자로 불리던 그는 성령을 제 맘대로 부릴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갖기 원했다. 이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철저한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이런 부류의 삯꾼들이 지천에 깔려 있으니 비극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복음의 증인되기 위한 권세이고(행1:8), 인간의 죄를 심판하고 정화하는 불이며(행2:3),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행2:38). 성령은 은금과는 상극이고(행3:6), 박해 받는 이에게 주어지는 담대함의 원천이며(행4:31), 순교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행7:55). 성령을 받은 이들은 자신을 한껏 낮출 뿐 아니라(행10:25-26), 높임 받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행14:14-15; 16:18). 사도행전은 영혼의 변화가 없는 능력의 나타남을 원하는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그 목록에는 앞서 언급한 사마리아의 시몬과 바울의 이름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려 시도했던 에베소 제사장 스게의 아들들도 포함된다(행19:14-16).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분이 아닌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 국한시키는 해석이 대한민국 ‘능력 종교’ 현상의 징후이자 원인이다. 분명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욕망의 요청을 절제하며 현재에 자족하는 성령의 사람에게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넘친다(빌4:12-13). 범사에 감사한다. 사도 바울이 그리하였고, 메시아(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떠났지만 그 제자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다시 사명을 깨우쳐 주신 주님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니라”(요일4:19)라는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랑의 힘을 주셨고, 그 힘을 받은 제자들로 하여금 ‘녹명’의 울음으로 온 천지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들판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어이 맑은 시내, 푸른 들판을 찾고 너무도 감격스러워 녹명의 통곡 소리를 내며 고운 사슴, 미운 사슴 가리지 않고 불러들이는 어른스런 사슴 한 마리가 ‘내(우리)’가 되어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속하시려 ‘먼저’ 십자가를 지셨듯이 사랑은 ‘먼저 사랑’이라 가르치신다. 그렇다. 먼저 사랑하는 것이 의미 있고, 영향력 있으며, 권위가 있다. ‘나(우리)’ 또한 주님의 참 제자로서 아픔 많고 문제 많은 세상이라는 들판으로 나아가 ‘먼저 사랑’의 울음소리를 내는 한 마리 사슴으로 생을 마치고 싶다. “가서 제자 삼으라”(마2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