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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고향 신안군 지도봉리교회 시작됐다



지도 봉리교회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마을에 설립된 봉리교회가 이 마을에서 출생한 한국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에 의해 시작 1951년 4월 15일에 시작됐다는 문서가 공개됐다.


그동안 김준곤 목사의 친척인 문준경 전도사가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사역을 할 때 봉리마을은 김준곤 목사의 집에 2~3일씩 머물면서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네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으나, 봉리교회가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CCC총재특보를 역임하며 김준곤 목사를 가까이에서 보좌했고, 김 목사의 역사 정리를 해온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는 김준곤 목사 서거 13주기인 지난 9월 29일(목) 문서를 공개했다.





신안군 지도 봉리교회 교회연혁 문서






지난 26일과 27일 전남 신안을 방문한 김 목사는 봉리교회 최용호 담임목사를 만나 펜글씨로 쓰여진 교회 연혁이 적힌 문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봉리교회 연혁>이라는 이 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15일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 목사는 한 달 후에 송리복 전도사를 봉리교회 초대 전도사로 청빙할 수 있도록 주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문서에는 “1951년 5월 15일 송리복 전도사가 초대 교역자로 부임하여(김준곤 목사 안내로) 당시 남상길 집사댁에서 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 목사가 한 달 만에 봉리교회 초대 전도사를 송 전도사로 청빙한 것은 6.25 전쟁의 상처와 아픔 때문으로 보인다.


봉리교회는 1952년 4월 송희복 전도사가 사임을 하고, 1952년 5월 감정리 소재 백련교회로 전 성도들이 임시 출석을 했다. 그리고 1954년 9월 다시 봉리 원동 소재 박금례 집사 댁에서 모였다.


1955년 9월에는 서동 남집사 댁에서 모였으며, 1958년 3월 24일 김재권 전도사가 부임해 1960년 4월 7일 원동에 16평의 초가 교회당을 건축했다. 1965년 4월 김재관 전도사가 사임하고 1966년 2월 7일 박형구 전도사가 부임해 1970년 5월까지 시무했다. 이어 1970년 10월 15일 정재원 전도사가 부임해 1972년 10월까지 시무했다.


1972년 11월 13일 이영조 전도사가 부임했으며, 1972년 12월 1일 성가대가 조직됐다. 교회가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3년 1월 1일 교회당 신축안이 통과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는 봉리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밭을 기증하고 큰 액수의 건축헌금을 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아픔 속에서 봉리교회 시작의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린 김준곤 목사는 1951년 9월 1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전남 영광 법성교회와 광주서부교회(현 서현교회)를 거쳐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장과 교목을 역임했으며, 여수 애양원 한성신학교 교수로 한 학기 사역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풀러신학교에서 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대학생 사역을 제안 받고 귀국하여 1958년 해외 국가로는 첫 번째로 한국CCC를 창설했다.


김 목사는 대학생 사역을 전개하면서 민족 복음화운동을 전개했다. 1965년 2월 22일 김종필, 박현숙, 김영삼, 정일형 의원 등 여야 기독 국회의원 20여 명과 함께 국회조찬기도회를 시작했다. 이어 국회조찬기도회 국회의원들과 함께 1966년 3월 8일에는 제1회 대통령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했다.


1968년 8월에는 민족복음화운동의 제3의 집단으로 “순”과 “사랑방” 전략을 실천할 나사렛형제들을 창단했다. 1969년에는 군의 정신력 강화를 위한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하고 2400 여 명의 영관급 장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971년 1월 1일 0시에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했다. 1971년 8월 대전충무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 요원 강습회, 1972년 7월 31일~8월 4일까지 춘천성시화운동 전도대회, 1974년 8월 12일~17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엑스플로‘74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 교회 부흥의 대로를 놓았다. 1980년 8월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80세계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하여 10만 명 선교사 헌신을 이끌어냈다.


김준곤 목사는 특히 6‧25의 상흔 속에 북한 동포들에게 통일 후에 북한의 4300여 동리에 대학생 전도자들이 들어가서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북한양촌운동을 주창했으며, 1990년 중반 북한 주민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수환 추기경,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과 함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조직해 10년 동안 공동상임대표를 맡아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에 앞장섰다.


또한 2002한일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아 친절‧봉사‧청결‧정직‧질서운동(KS-CHO)운동을 펼쳐 월드컵의 성공개최에 기여하는 등 평생을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한 민족과 세계를 품고 사역을 했다. 2009년 9월 29일 서거했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으나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는 말씀”이라며 “한국 교회 교인수가 많이 감소했고,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 박성민 목사)와 세계성시화운동본부(대표회장 김상복 목사, 전용태 장로)는 지난 8월 2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1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데 이어 오는 11월 7일 오후 3시 신안군 증도면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김준곤 목사 선양 제2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학술심포지엄 개최에 맞춰 순교기념관에서 ‘김준곤 목사 어록전시회’를 개최할 준비하고 있다. 순교기념관을 찾는 순례객들에게 김준곤 목사의 주옥같은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기사제공=뉴스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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