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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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에는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휴양지로 사용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노고단에는 과거 수양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형체만 남아 있고, 왕시루봉에는 별장을 포함한 건물 12동(집 10, 교회 1, 창고 1)이 보존되어 있다. 1921년부터 조성하여 한 때는 56채의 건물이 있었고 선교사들이 여름날 더위와 모기 등 풍토병을 피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하였던 곳이다. 레널즈는 이곳에서도 성경을 부지런히 번역하기도 했다. 이 지역 교계에서는 구례군과 함께 이 귀한 자산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하였는데, 뜬금없이 불교계의 반발이 심해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불교계든 기독교계든 저마다 지녀온 문화와 역사적 자원들이 나름 귀하고 가치 있는데, 이를 보존하고 역사화 문화화 하는 귀한 일들을 서로 반대하고 소모적 논쟁을 벌이며 종교간 갈등을 빚는 게 요즘도 빈번하여서 참 안타깝다.
1세기 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기독교 선교사들을 불교계 스님들은 환대하며 좋은 관계로 지냈던 일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알렌 이후 여러 선교사들이 뒤를 이어 합류하였고, 그들이 열심 있게 사역을 벌이는 한편 그들도 때론 산과 들을 찾아 소풍을 가기도 했고, 무더운 여름이면 좋은 휴양처가 어디 있는 지 찾아 나섰다. 알렌이 시작한 1884년 이후 4년 만에 북한산에 자리한 좋은 휴식 공간을 마련했는데, 다름 아닌 불교 절이라는 게 참으로 독특했다.
지금이야 리조트니 호캉스니 하는 것들로 풍요로운 시대를 우리가 지내고 있지만, 100여 년 전에 조선의 우리 현실은 너무도 언감생심이었다. 미국 중상류 문화와 사회 속에 지내온 선교사들이 구한말 조선 어디에서 그만한 시설과 장소를 찾아 휴식을 찾고 새롭게 충전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로선 산 속에 자리한 사찰이 거의 유일하고도 최고의 피난처였다.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중흥사. 당시 주지 스님은 참으로 착한 종교인이었으려나,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성경 말씀을 알 리 없었을 테지만, 불교의 가르침 따르는 불자로서 유사한 태도와 마음을 표했으니 참 대단하다.
1888년 5월 꽃이 피고 녹음 짙어가는 봄날 호튼(1년 후 8년 연하 언더우드와 결혼) 여의사와 몇 선교사들이 함께 북한산성에 말을 타고 소풍을 갔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중흥사가 여름철 피서지로 너무 좋게 여겨 며칠씩이고 이곳에서 묶다가 가곤 했다. 무어 선교사는 아내가 해산할 날이 다가오자 이곳 절에 찾아왔고 빈튼 의사 등도 동행했는데, 주지가 이들로 새 아기도 낳고 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줬다.
1910년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해 6월 22일부터 6일간 아예 기독교 수양회를 절간에서 연 것이다. 황성 YMCA는 약 50여명이 삼각산 진관사에 모여 제 1회 하령회(여름수양회)를 열었다. 한국 YMCA를 시작한 질레트 선교사가 준비하였고 월남 이상재 선생 등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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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왕시루봉에 남아 있는 미남장로교선교회 별장 |
관악산 삼막사에 간 유진 벨
유진 벨이 도착한 해인 1895년 여름에 유진과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삼막사를 휴양지로 삼아 그곳에 진을 쳤다. 관악산 뒷자락의 안양 삼성산에 소재한 오래된 사찰이다. 일본으로 여름 휴양을 떠난 테이트 남매를 제외하고 전킨, 레널즈, 드루 부부와 데이비스 그리고 유진 벨 부부가 함께 집단으로 이 절에서 여름 오랜 기간을 보냈다. 무더위도 그렇고 높은 습도도 다소나마 덜했고, 상대적으로 모기 등을 피할 수도 있었으며 여러모로 건강과 일상 활동이 서울 정동 시내보다는 한결 좋았다.
서울에 도착한 2년차 여름에 레널즈 부인 팻시 여사가 앓아눕기도 했고, 레널즈와 전킨의 어린 아이들이 일찍 사망한 것 등은 서울의 고온다습한 기후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기에 이해 여름엔 몸을 돌보고 쉼을 얻기 위해 집단으로 높은 산속의 절을 찾았다. 최근엔 집을 떠나 시골이나 외국에 잠시 머무는 ‘한 달 살기’가 유행한다는데, 선교사들은 당장의 현실적 이유가 커서 여름 두 세 달은 산 속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저희가 이교도들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스님은 하루에 두 번 법당에 들어가 저들 우상(불상) 앞에서 예배합니다. 저들은 밤마다 그 일로 하루를 마치고 매일 새벽 또 그 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들 예배는 그들 우상에게 절하고 염불을 외우고 종을 치고 북을 치며 마치 잠자는 저들의 신을 깨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아침 식사 후에 넓은 마루에서 기도회를 합니다. 레널즈와 전킨 선배가 돌아가면서 한국말로 인도합니다. 우리 하인들이 이 기도회에 함께 참여하고 4-5명의 스님과 일반인들이 저희들 하는 모습을 보고 듣습니다. 우리는 찬송가를 한국말로 부르고 성경 구절을 읽고 설교하고 기도합니다. 구경하는 이들이 개종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유진 벨, 1895년 6월 26일)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지난 1895년 6월 중순 유진 벨 부부는 정동 집을 떠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삼막사로 올라가 9월 초까지 두 달 보름 이상을 지냈다. 여러 가정들이 오래도록 지내야 해서 벨 가족만 해도 9명의 짐꾼을 동원하여 온갖 가재도구들을 날랐다. 가히 이사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삼막사 주지의 배려로 방을 얻어 하인을 시켜 수리하고 리모델링하여 선교사 가족들은 하인들과 함께 그 여름을 산 속에서 지냈다.
8월 1일 밤에는 드루 아내가 첫 아들을 그곳에서 낳았다. 레널즈 첫 아들 윌리암과 전킨 첫 아들 조지를 잃고 양화진에 묻힌 이후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얻은 하늘의 새 보물이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었다. 드루는 주지에게 5불을 주며 절간의 모든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열었다. 한국 풍습대로 떡도 하며 삼막사에서 일하는 하인들까지 나서 잔치하는 경사스런 일도 함께 하였으니 요즘이라면 대단한 센세이셔널 뉴스다.
종교가 전혀 다른 불교 스님과 기독교 선교사들이 두 달 이상을 산 속의 격리된(?) 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낯선 상대의 예배와 종교적 도리들을 서로 배우며 공감하기도 하고 차이와 다름에서 서로의 결기와 독선적 의기를 불태우기도 하였을 터이다. 불교와 기독교, 서로 지향하는 구원의 도리는 타협 불능, 양보 불가의 독선이나, 그 지향하는 방향과 세상에 대한 호혜는 보다 넓고 이해 배려가 새로워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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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2-10-11 17:1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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