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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섬김의 도리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지난 월요일, 그러니까 9월 26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너편에 위치한 녹십자아이메드에 정기 진료차 다녀왔다. 진료를 마치고 뒷길을 걸어가는데 주일이 아닌 월요일인데도 골목길과 사랑의교회 쪽에 수많은 선넘선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마다 교역자들임을 금방 알 수 있었고, 더불어 골목의 대형 제과점이며 식당마다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라는 사랑의교회에서 제작한 포스터와 그 옆에는 A4 용지에 ‘사랑의교회 식권 받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그 교회가 어떻게 한국 교회를 섬긴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갖고 귀가하였다.


그리고 그 후, 나의 카톡방에는 메가처치(Mega Church)의 ‘경이로운 섬김(?)’이 유감없이 떠올랐다. 그 중 하나 세계기도선교회 총무이며, 한국농촌선교학교 교장 유광종 목사의 <경품 이벤트로 섬겨야 하는가>라는 글을 옮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원칙이 있습니다. 경품 행사는 일반에서 많이 하는 이벤트인데 교회에서 경품 이벤트로 흥행을 도모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요, 성스럽지 않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 교회가 물량주의, 맘몬주의에 빠졌는지 그 결과 너무도 어지러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5천 5백 여 교회 주의 종들은 전국에서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힘(능력) 있는 교회는 반대로 힘없는 연약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한 것입니다. 교회가 머릿수로, 재정으로 힘이 있고 없고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교회를 돕는다면 끌어 모으는 이벤트가 아니라 조용히 섬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방의 중형 교회도 노트북이 필요하겠지만, 차라리 총회 전도부를 통해서 작은 농촌 교회에 조용히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국민들의 시선도 교회가 제식구 감싸고 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가난한 고아가(연령 제한으로 퇴원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도 있고, 고난 받는 이웃들이 있는데 차라리 이 재정으로 가난한 국민들을 섬겼으면 한국 교회에 더 큰 덕이 되었겠지요. 총회를 구성했으면 (개교회주의가 아니라) 총회 구제부를 통해서도 일반 구제를 많이 하면 어떨까요? 개교회에서도 총회에서도 한국 교회에서도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1박 2일로 그 많은 교회들(섬김이들)을 초빙하여 경품을 뽑아 누구는 뽑혀서 기도 많이해서 기분 좋아 주님의 뜻(?)으로 되고, 나는 재수 없어 안 됐다는 일이 무엇입니까? 고 옥한흠 목사는 철저하게 말씀으로 섬겼던 분입니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말씀과 기도로(뭇 영혼을 깨우고) 약한 자를 돕는 것은 경품으로(사행심으로) 돕는 행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성경적) 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그 곳에 참여하는 분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좋은 (취지의) 행사라 할지라도 주최측의 품격 있는 모습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주최하는 교회가 노회의 추천을 받아 조용히 총회를 통하여 섬겼으면 먼 길 오가는 비용도 절약되었을 것이고, 숙박비도 엄청나게 절약되어 어려운 살림을 하는 약한 교회에 더 큰 나눔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은 주님께 드려진 헌상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재정도 잘못 쓰여지면 책임을 추궁하는데 (하물며) 성도들이 피땀흘려 하나님께 바친 연보를 거룩하게 더 거룩하게 집행하고, 나누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경품 이벤트가 아니라 차라리 두 손 붙들고 기도하며 나누었으면 더 좋겠지요. 노래하며 춤추는 위로 경품 이벤트. 이것은 거룩한 주님의 것을 나누는 방법은(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2022. 9. 27. 한국농촌선교학교 목사 유광종


사랑의교회의 「한국교회 섬기는 날」행사의 취지와 내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필자로서 사랑하는 동역자 유 목사의 글 하나만으로 긍정, 부정은 무리 같지만 전언에 따르면 초청된 수가 사랑의교회가 속한 예장(합동) 교단 목회자 2천 5백 가정, 그 밖에 초교파 교회 3천 가정, 도합 5천 5백 가정이며, 경품 1등은 뉴스타렉스 승합차 10대를 비롯 최소 노트북까지 3천 5백 개 품종, 그리고 1박 2일 숙박비, 식음료, 간식, 교통비 등이라고 하니 아마 천문학적 비용이 지출되었음은 분명하다. 가히 ‘크고, 많고, 화려한 것에 매달리는 욕망의 교회’(Mega Church)답다. 현대 한국 교회가 ‘과잉 개인주의’에 사로잡혀있다는 방증(傍證)이다. 이 배경에는 ‘능력 종교’(Power Religion)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능력’이란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치유하며 높은 지위에 오르는 개인적 능력과 기독교가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사회적 능력, 이 모두를 가리킨다. 이는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 능력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같은 자연적 능력을 포함한다.


능력을 얻은 비결은 성령은 받는 것이고,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그 능력을 받아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도 하며, 박해를 견디고, 선교의 열매를 맺으며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Christendom)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막 9:23, 행 1:8, 빌 4:13, 렘 33:3).


이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갖는 것이다. 우리 나라 초대형 교회 원로 목사는 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성도들을 향해 ‘사탄이요 간첩’이라는 막말을 할 정도다.


지금 우리는 풍요와 능력을 최우선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른바 능력주의 시스템에서는 자신을 부풀리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말한다.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자신을 광고하라고 권한다. 성도들에게 한층 성공에 집중하라 부추기며, 더욱 약삭빠른 동물이 되라고 독려하는 뒤틀린 이 문화로 자기 중심주의를 극대화 한다. 성취를 중시하는 이 문화에서는 타인의 인정을 받는 데만 몰두하고, 외적인 찬사를 삶의 척도로 삼게 만든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영웅화하는 동시에 여기에 맹종하는 성도들을 나약한 영혼으로 만들어 낼 뿐,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데 필요한 신앙적, 도덕적 능력은 위축 내지는 상실 시키는 한편, 이 능력주의 문화가 결국에는 성도의 의식구조를 완전히 물질적 사고로 변질시켰다. 한 마디로 능력주의가 만들어 낸 이기적 인간상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능력(Spiritual Power)을 받아 큰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순결한 지혜가 가득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인격을 갖기 위함이다.


물론 성령은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어떤 능력인가가 중요하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가장 핵심은 죄를 이기는 내적 능력이다. “믿는 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적 능력”으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부자가 되어도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은 내적 능력이 밖으로 나타난 증거이며,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중세 말기 로마가톨릭교회가 교리와 삶에서 심각하게 타락했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신학의 인본주의화’였다. 특히 인간론에 있어서 인간의 영적 무능력과 전적 타락은 무시되고, 인간의 능력과 자유의지, 그리고 선행 가능성 등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구원 받은 자로서의 현세의 삶을 어떻게 영위해 가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여 무조건 따르는 수동적 신앙생활이었다. 오늘의 한국 교회, 특히 대형 교회 성도의 현상이 딱 그렇다. 성령 사역의 왜곡이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성도를 섬김으로 교회를 세우며 세상에 봉사하라는 것이다. 이 능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권력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능력으로 거룩함을 되찾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진리의 기둥 터’(딤전 3:15)로서 정체성이 빛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신학이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는가? 가장 낮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위로하며 소망을 주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원래 복음은 만민을 위한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도 전혀 없었다. 주님은 남녀와 노유(老幼), 빈부와 귀천, 주류와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특히 세리와 창기, 나그네와 과부 등 그 시대의 가장 천대 받고 소외된 계층에게 큰 관심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을 따라 모든 영혼들을 차별없이 함께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필수 속성 중 하나이다.


이제는 우리 한국 교회가 성경적 교회론을 회복해야 산다. 신앙이란, 곧 ‘예수 따름’이 아니던가?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예수 따름’의 핵심적 교훈이요 가치다. 이를 요약하면 “나(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 7:24), 곧 예수님의 제자도는 하나님과 형제 자매를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개인과 공동체가 교회론의 핵심 가치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신다(마 7:24-25).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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