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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언어’ 괴물과 씨름하고 ‘이’와 밤새 전투하며

<기획특집> 유진 벨 선교사



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서울에 도착한 유진 벨 부부는 처음에는 언더우드 집에 머물렀지만, 이내 딕시 하우스로 옮겼다. 전킨과 드루 부부가 군산으로 테이트 남매가 전주로 내려가 정착하면서 비어있는 딕시로 들어간 것이다.



딕시는 7인의 선발대가 처음 서울에 와서 여태껏 지내던 베이스 캠프였다. 처음엔 독일 공사가 쓰던 것을 미국 공사 알렌(미북장로교의 한국 첫 선교사)이 매입하여 쓰고 있던 중, 그가 새로이 미 대사관 사택으로 옮기면서 미남장로교 선교회가 1,500불에 매입하였다. 정동 덕수궁 근처에 있던 이 집은 당시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 가옥으로 큰 방이 여섯 개나 되었다. 선교사들이 이 집을 딕시라 불렀다.



‘딕시(Dixie)’는 미국 남부 지방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1859년, 대니얼이라는 사람이 발표한 노래 “Dixie”가 남북 전쟁 당시 남부군의 행진곡으로 사용된 데서 유래했다.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미 북부 사람들을 양키라고 하였고, 버지니아, 캐롤라이나, 켄터키 등 워싱턴 이남의 남부 사람들은 딕시라고 불렀다. 이 사택에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처음 입주하면서 자연스레 이 사택을 딕시라고 부른 것이다.


 
3년 먼저 와서 정착하며 전라도 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선배들은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한국어를 익히고 기후에 적응하는 한편 조금씩 서울 지역에서도 전도하며 나름 사역을 펼치고 있었다. 조선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는 내한 2년차 1893년 봄부터 딕시에 여성과 아이들을 초대하여 전도하며 노래도 가르치고 성경 말씀도 전하였다. 아이들과 자주 부르는 찬송은 “예수 사랑하심”이었다.



그런데 미혼 여성인 그녀가 다른 유부남 선교사들과 어쨌건 한 집에서 거주하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그다지 좋게 여겨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듬해 1894년 봄에는 미북장로교 독신 여선교사인 수잔 도티 집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여성과 아동 사역을 새롭게 벌였다. 지금의 서울 중구청이 있는 지역인데 당시는 ‘인성부재’라 하는 동네였다. 이곳에서 데이비스는 어린이 예배를 인도하였고, 이내 레널즈가 합류하여 주일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전라도 지역을 선교지로 배정받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내려가 사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서울에서 미남장로교는 첫 선교 교회로서 인성부재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미남장로교 선배들은 유진 벨이 오기까지 3년여 동안 꾸준히 전라도 지역을 정탐하며 선교지 물색과 준비를 벌인 와중에, 서울에서도 장터에 나가 전도하며 나름 아이들 사역과 함께 교회를 세워 활동을 펼쳐가고 있었다.



1895년 군산과 전주에 대한 사역을 본격적으로 펼치며 선배들이 내려가면서 새롭게 서울에 충원되었던 유진 벨은 그들이 남기고 떠난 딕시에서 적응하며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사역을 준비하였다.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조선어 공부였다.



외국 선교사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고통(?)에 빠지는 게 조선어 익히기였다. 우리도 수십년 해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않나? 어순이 다르고 너무도 차이가 심한 영어와 한국어 탓에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대할 때 마치 괴물(hydra)같다고 토로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데 너무도 애를 먹었다. 유진 벨도 한국어의 존대어를 익히는 게 가장 어려웠다. 선교사는 개인 교사에게 월 8불의 급료를 주고 일대일 교습을 받았다. 그 외에도 당시 선교사는 집에 하인을 두었고, 요리를 담당하는 조리사를 채용할 수 있었다. 조리사가 해주는 음식 맛은 처음에는 안 맞았겠지만, 잘 먹고 잘 지내려 노력했을 것 같다. 서울 온 지 한 달 만에 유진 벨 부부는 각기 체중이 늘었는데, 벨은 62kg, 아내 로티는 56kg이었다.





전도 활동을 벌이는 변창연 조사(왼쪽)







유진 벨의 첫 조사 변창연

벨 선교사도 어학 선생(language helper)을 특별히 채용하여 아침에는 점심때까지 언어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유진 벨의 어학 선생은 처음에는 이씨 성을 지닌 자였는데, 곧 변창연으로 바꾸었다. 리니 데이비스의 어학선생 경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이제 벨 선교사의 어학 교사 겸 조사로 일하였다. 변창연은 이때부터 유진 벨의 초기 신실한 헬퍼로서 벨이 전라남도에서 선교를 시작하도록 가장 가까이서 협력하였다.



나주 선교가 처음에 잘 이뤄지지 않아 벨이 철수할 때도 변창연 조사는 나주에 남아서 그곳 유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할 수 있는 대로 기독교의 뿌리를 심으려 애썼다. 나중에 목포에서 유진 벨이 정착하여 교회를 시작하게 되자 목포로 합류하여 벨의 모든 선교 사역의 큰 역할을 감당하였고 광주와 전남 북부 지역 전도와 교회 개척에도 가장 앞장서서 일하였다. 그는 1908년 장성 영생교회 장로 장립하였으며, 장성과 광주 교회를 위해 일생을 충성하였다.



유진 벨의 하루 일과는 아침엔 변창연 선생과 조선어 공부하고, 오후엔 텃밭 가꾸기 등으로 소일하거나 자주 시내 나가 조선의 거리를 익히기도 하고 조선의 사람과 문화 환경을 익히는 것이었다. 넓은 언더우드 집을 이용하던 맨 첫 시기엔 텃밭이 제법 커서 하인과 함께 한국의 채소를 기르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원래 농사꾼이었던지라 유진 벨은 조선에서도 소규모이나마 농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하였다. 상추, 무, 비드, 파슬리, 케일, 순무, 양파, 파스닙, 우엉, 콩, 옥수수, 감자에 더해 수박, 블랙베리, 포도, 토마토 등의 과일까지 종류도 많게 심고 가꾸었다.



선교지에서의 재미있는 일도 벌이지만 언어 익히는 것과 함께 하루하루 힘들게 했던 또 하나의 고충은 ‘이’, ‘빈대’, ‘벼룩’ 등 아주 작은 곤충들과 함께 지내는 일이었다. 사람의 몸 곳곳에 기생하는 이 녀석들은 여태 접해보지 못한 선교사들에게 보통 괴로운 게 아니었다. 밤에 잠 잘 때는 더 고통스러웠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누웠다가도 조선 사람들처럼 벌떡 일어나 웃옷을 벗어젖히며 이를 잡아내고 빈대, 벼룩을 털어내느라 밤새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거주하는 집 방에는 벌레 약을 잔뜩 뿌려 놓아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닌데, 가끔 전혀 낯선 지방 출장을 다니며 그곳 주막에라도 들러 잠을 자야 할 때는 보통 곤욕스런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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