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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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나라의 ‘위기를 바로 기회’로 전환하여 근대 일본제국 건설의 초석이 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통치 시대(1603-1868)의 우리 나라는 조선 시대였고, 중국은 청(淸) 시대였다. 임진왜란 이후 수립된 도쿠가와 치하의 일본은 상업과 화폐경제가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였으며, 농민들의 생활 역시 제법 높았다. 정작 경제적 혜택을 입지 못한 계층은 사무라이(武士)들이었다. 그들은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에게서 쌀을 봉록으로 받아 생활하는 봉급생활자였다. 그렇다면 사무라이들은 무엇으로 출세할 수 있었을까? 전쟁(戰爭, War). 전쟁이야말로 사무라이들의 존재 이유였다.
도쿠가와 시대 270 여 년은 이렇다 할 전쟁 없이 19세기 중엽에 이른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쟁 대신, 천하 대사의 정치에 뛰어들어 칼을 허리춤에 찬 채 유학(儒學)에 관련된 책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어느 날 갑자기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원래 일본은 섬나라였기에 천혜의 요새에 가까웠다. 하지만 풍향에 관계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병력과 신식 화기와 신기한 상품들을 운반할 수 있는 증기동력(蒸氣動力)으로 운항하는 서양의 군함과 증기선의 등장은 순식간에 일본을 안보상 위험지역으로 돌변시켰다. 권력에 취했던 쇄국주의 바쿠후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지사들을 쓸데없는 분란자로 치부하였다. 신식 화기로 중무장한 영국의 증기함 앞에 청(淸) 나라는 무릎을 꿇었다.
요시다 쇼인의 일본은 신속하게 반응했다. 청(淸)의 아편전쟁을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가 동남아시아, 호주를 침략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고, 오키나와의 류큐열도와 조선에 이양선이 출몰하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쇼인은 앉아서 세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벌떡 일어나 발품 여행을 통하여 시대를 읽었다. 그의 깊지 않은 일상을 감옥 아니면 여행이라고 할 정도로 당시 일본 열도였던 규슈(九州)를 비롯하여 시코쿠(四國), 혼슈(本州)를 누볐으며, 미국·영국 등 서방세계에도 발을 디딜 꿈까지 꾸면서 자신의 내면을 채워 나아갔다. 그의 이와 같은 여행을 ‘바쿠후’ 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까지 강행했던 것은 단순히 주유천하(周遊天下)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쇼인의 꿈은 서양 열강을 능가하는 대일본제국 건설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세상을 견문하고, 세계관을 넓히며, 확고한 자기 정체성(Identity) 확립을 위한 일본 역사 조명에 열중하는 걸음이었다. 일본 건국의 조상인 여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토’(神道)를 국교로 하여 그 신이 낳은 일왕은 하늘의 황제 곧 태양신 ‘텐노’(天皇)를 숭경(崇敬)하고 국가의 상징으로 추앙함으로써 7백 년 ‘바쿠후’의 사무라이 체제를 정상적인 독립 국가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에현(三重県)에 소재한 초대 진무텐노(神武天皇)의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성역화하고, 교토(京都)의 왕실을 에도(江戶)로 옯겨 도쿄(東京)라 칭하기로 설계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각 지방 석학들과의 학문 교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종래의 검술로는 서양을 상대할 수 없다는 절박성을 간파하고 해군 육성을 재촉하였다. 언필칭 역사의 갈림길(轉換點)은 이런 데서 비롯된다.
쇼인은 번 영역 외 여행금지령 위반으로 수 차례의 감옥살이 중 554권의 독서와 고향에 돌아온 3년 간 천오백 여 권의 책을 독파할 정도의 독서광이었다. 그는 결국 해외팽창론자가 되어 홋카이도(北海島)와 주변 섬, 오키나와(沖縄)의 류큐 열도를 일본국으로 편입시키고, 중국과 만주의 분리 통치 이전에 조선반도를 침략 통치한다는 야욕을 굳혔다. 이 야욕의 첫 발판이 울릉도였으니, 울릉도는 쇼인이 꿈꾸는 해외 팽창의 발판이었던 것이다.
조슈 번 ‘하기’(萩)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이렇게 일본 국가주의 우익 세력의 원조가 된 셈이다. 그는 병학자, 사상가, 교육자로 초망굴기(草莽崛起)하여 부국강병 세력의 리더가 되어 반바쿠후운동(反幕府運動)을 선동하다가 그의 꿈은 숙제로 남긴 채 1859년 수물 아홉 피끓는 나이에 참수 당하였다.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남겨 놓은 외침은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 ‘일본혼’)였다.
우리 조국 대한제국과 중국, 나아가서 아시아 침략을 가르치고 도모한 산실이 바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이다.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安倍) 전 총리의 우월적 국가주의 사상을 쇼인에게서 찾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살에 ‘하기’의 사숙을 운영하던 숙부에게 양자로 든 쇼인은 어렵고도 혹독한 강훈련을 이겨내어 19살에 병학사범(兵學師範)의 반열에 올랐고, 그 사숙을 ‘쇼카손주쿠’로 개칭 발전시켜 그의 야망에 동조한 문하생들이 ‘메이지 유신’을 명분삼아 침략의 선봉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쇼인의 대표적 문하생들은 다음과 같다.
①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1839-1867, 하기 출신). 일본 제국 육군의 전신이 되는 ‘기헤이타이’(寄兵隊, 말을 탄 기병대 騎兵隊가 아니라 일종의 게릴라 부대)의 창설자이며, 문무를 겸비한 풍운아로서 쇼인의 국가주의 사상을 철저히 구현해나가다가 병사한 인물이다. 아베(安倍) 전 총리의 가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본인은 물론 그의 조부 이름에도 ‘신사쿠’(晋作)의 ‘신’(晋) 자가 들어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외무대신 역임, A급 전범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사위)의 이름에서도 직감된다.
②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야마구치 출신). 대한제국 국권 침탈의 원흉이며 1, 5, 10대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으로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 중 하나이다. 10대 총리 재임 중인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 당해 사망했다.
③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 히기 출신). 이토 이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 삼존’(長州三尊)으로 불리며, 일본 군벌의 조상, 육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창설 멤버이다.
④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하기 출신). 쇼인의 문하생 사무라이로서 영국 유학을 다녀온 학구파다. 금융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메이지유신의 금융공신으로 미국의 중앙은행 시스템을 도입하여 통합된 화폐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제1대 이토 내각의 외무상, 대장상 등을 역임했다. 1876년에 전권대사로 우리 나라를 방문하여 강화도조약을 강제 성사시켰으며 1897년 10월 1일 대한제국의 칙령을 반포하여 목포, 군산, 진남포를 개항하게 하여 쌀, 면화, 소금, 지하자원 등을 침탈해 갔다. 1900년 목포 일본영사관도 개관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⑤1905년 7월 29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제국의 총리 카츠라 타로(桂太郎)와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테프트( William Howard Taft)와의 이른바 가츠라 테프트 밀약의 당사자 가츠라 역시 야마구치 하기 출신이다.
그 밖에도 사츠마 번(薩摩藩, 지금의 규슈, 가고시마 鹿児島)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1828-1877)와 도사 번(土佐藩, 지금의 시고쿠 고치 현 高知県)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가 있다. 다카모리는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3걸의 한 사람으로 대한제국 침략을 강력히 주장한 정한파(征韓派)였다. 료마는 사무라이 상인으로서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주도하여 실질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다.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츠마 번, 조슈 번과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이끌어 내어 7백 년 바쿠후 통치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입헌군주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 책사의 한 사람이다. 전후 일본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일본 통치 수단으로 전시 각료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 A급 전범들도 재판 후, 특별 사면하여 권력의 중심에 부활시켰다.
일본인의 의식구조에는 바쿠후 사무라이 정신과 요시다 쇼인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야마구치 출신들이 일본 정치를 이끌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일본 역대 총리 중 3분의 2가 야마구치(山口) 조슈 출신이라는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전후 첫 총리 이케다 시게루(池田茂, 1878-1967)는 도사 번(시코꾸 고치 현) 가문으로 직업외교관 출신이다. 태평양 전시 외무상으로 입각했으나 총리 겸 육군대신, 3군 참모총장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입장과 달리 하여 축출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전후 세대 가장 젊은 나이로 첫 총리에 오른 아베(安倍) 역시 키시(岸)의 외손자로서 야마구치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이 주창했던 야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고, 그 야망을 계승하려는 기시다(岸田) 내각의 아베 국장(國葬)은 어쩌면 그 내면에 정치적 진실이 깊숙이 숨어 있음에 틀림없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