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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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과 로티 신혼 부부는 1895년 2월 1일 켄터키 루이빌에서 선교 장도에 올랐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를 타고 중부를 거쳐 서부 태평양 연안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게 일주일 만인 7일이었다. 그곳 샌프란시스코 옥시덴탈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5일간 시내 관광과 쇼핑을 즐겼다.
12일 일본으로 가는 배를 구해 탔다. 석탄을 때서 운용하는 증기선 “오세아닉호”다. 난생처음 배를 그것도 엄청나게 큰 배를 탄 것이다. 먼저 일본이나 중국 혹은 한국으로 갔던 선배 선교사들이 탔을 배임에 틀림없다. 3년 전 미남장로교 1진으로 먼저 조선으로 향했던 7인의 선발대원들도 떠올렸다. 그들은 지금 내가 가는 그곳에서 잘 정착하며 선교를 잘하고 있으려나? 유진 벨 부부도 잔뜩 고조된 감정과 함께 선교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타오르는 열정과 의기는 얼마가지 못했다. 배가 점점 너른 대양으로 나아 가면서 파고가 심해 몹시 흔들린 탓에 몸에서 거부 반응이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그렇잖아도 처음 타보는 배 아니련가. 두 젊은 청춘은 다른 이들과 함께 바다위에서 곤욕을 치루며 몇 번이나 토하고 토했는 지 모른다. 몸이 좀 괜찮다 싶어 가까스로 음식을 다시 먹었다치면 이내 또 멀미를 해댔다. 그러길 수차례 며칠을 해대며 고생했는 지 모른다. 순간적으로나마 뭐하러 이 고생길에 올랐나, 잠시나마 회의 아닌 회의도 들었다. 생애 처음 겪는 몸살 고통도 그렇지만 높은 파도가 갑판 위로 치댈 때면 온갖 두려움도 크게 다가왔다. 언제라도 이 큰 배가 바다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리운 부모 형제가 떠오르고 자칫 이 아무도 모르는 바다 한 가운데 수장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앞선 게 사실이다. 바울과 함께 따라나선 마가 요한이 왜 1차 여행도중 못하겠다고 도망갔는 지 이해도 생겼다. 그렇게 어떤 날은 파고와 멀미로 죽을 것 같은 고생을 경험하였지만, 어떤 날은 참으로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 위를 달리며 자연의 광활함이 주는 부요와 하늘의 은혜에 젖기도 하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끝없는 바다,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수평선이 한 40여킬로 된다고 했나? 도대체 며칠이나 더 이 험한 파도를 지나야 육지가 모습을 드러내려나? 불과 며칠 전에는 온통 높은 산악이나 사막 같은 광야 지평선을 기차로 달렸었지 않나. 마을은커녕 집 한 두 채 보기 힘들 정도로 일주일 여를 기차로 달렸었는데, 지금은 태평양 한 바다 위 어디쯤 지나는 걸까?
한국에 선교사로 첫 발자국을 뗀 유진 벨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지 어디에 있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불현 듯 아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고 느껴졌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임명되어 파송지로 가는 중이다. 하나의 문화를 떠나서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춤의 시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 이 배 안에선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새로운 땅에 도착하는 그 긴 시간까지 삶의 행보는 멈춰 서있고, 지금이야말로 지나온 삶을 다시 성찰하는 좋은 기회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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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4월 4일 부산 도착을 알리는 편지 |
때론 내가 멈춰야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 멈춤의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을 찾는 시간 아니련가? 내 의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멈춰서 있는 이 시간을 통해 나의 인생과 선교에 대한 소명을 재확인한다. 이런 시간이 참으로 중요하리라. 앞으로 펼쳐질 조선에서의 삶과 선교적 과업이 얼마나 바쁘고 벅차랴. 주어진 일과 이상으로 열심내고 충성하다가도 가끔씩 이런 ‘멈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가진 멈춤의 시간 속에서 선교는 ‘하나님을 좀 더 진실하게 만나는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됐다. 하나님의 선교란 나의 열심과 충성이나 의지가 너무 앞서면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 앞서 일하시도록 자주 자주 멈춰 서는 법을 익혀야 하고 그렇게 해야 하리라, 너른 대양을 응시하며 새삼 다짐한다.
2월 19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역시 일주일 만에 육지를 밟았다. 하루 동안의 땅 위에서의 휴식이 달콤했다. 배 위에서의 긴장과 위협을 벗어나 호놀룰루의 이국적 풍경에 매료되기도 했다. 미국령이긴 하지만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일본인 중국인을 비롯한 원주민 등으로 이방인들의 세계에 비로소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을 느꼈다.
20일 다시 출발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게 3월 5일 화요일이다. 여긴 정말 다른 이방세계다. 한 달 여 교통 시간을 들여 미국 곁을 떠나온 시공간의 거리만큼 완연한 동양 세계의 한 가운데 발을 디뎠다. 집에는 의자가 없고 바닥에 앉고, 차를 타면서도 다리를 밑으로 내리지 않고 다리를 모아 좌석위에 틀고 있는 모습부터가 달랐다. 식사할 때 젓가락을 쓰는 것도 다르고 공중 목욕탕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벨과 로티는 동양의 다른 삶과 문화를 대하며 이질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생각하며 이방 문화를 보고 배우는 일에도 시간을 들였다. 그들은 한편으로 목적지인 한국에 속히 가고자 했지만, 당시 배 사정이 어려웠다. 한창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일본 군부는 모든 여객선들도 군속아래 통제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떠나는 배가 자꾸 지연되고 미뤄진 탓에 유진 벨 부부는 생각지도 않게 오랜 시간을 일본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나고야로 고베로 그리고 나가사끼로 돌며 일본 주재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교제하기도 하고 일본 풍물과 동양사회에 마음을 여는 시간을 가졌다.
무려 한 달이나 일본에서 체류한 끝에 드디어 나가사끼에서 “챠우챠우호”를 타고 4월 3일 현해탄을 건넜다. 배에는 조선으로 향하는 북장로교 여선교사들도 있었다. 조지아나 휘팅 의사와 제이콥슨 간호사였다. 조지아나 휘팅과 이때 처음 대면한 불 부부는 나중에 오웬이 목포에서 총각으로 있을 때 이들을 중매하여 결혼시켜 주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목포와 광주에서 오래도록 함께 인연을 맺게 되고 선교 동역을 하였던 것이다.
4월 4일 드디어 한국의 첫 땅, 부산에 도착 그곳에 있던 베어드 선교사의 환영을 받았고 다시 남해와 서해를 거쳐 8일에는 제물포에 도착하여 드루와 전킨 선교사의 마중을 받았다. 그 선배 선교사들은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먼저 생긴 인천 대불호텔에 이어 중국인이 운영하는 우리 나라 두 번째 호텔 ‘스트어듀’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나룻배 세 척에 선교사 6명이 유진 벨이 가져온 짐 55개를 싣고 한강을 거슬러 서울에 입성하였다.
미국 고향을 떠난 지 70여일 가까이 되어서 비로소 파송지 한국에 도착하였다. 유진 벨의 나이는 27세, 아내 로티는 28세였다. 함께 가정을 이뤄 청춘을 바쳐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한국에 생명의 볼모자가 되려 찾아온 유진 벨 부부. 그의 고귀한 도전과 사명에 어찌 하늘의 기름 부으심이 없을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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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2-08-26 10: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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