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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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일.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66세) 전 총리가 참의원 선거 유세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우리 한국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격범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 일본 언론은 범인이 한국계인지 모른다는 추측 보도와 함께 혐한 감정(嫌韓感情)을 부추기는 듯한 자극적인 언급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시간도 채 안되어 저격범은 그곳 나라시(奈良市)에 거주하는 41세의 청년 야마카미 태츠야(山上哲也)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언론 매체는 왜 경솔하게 저격범을 ‘한국계’ 운운 했을까? 또 어제 보도에 의하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내각은 9월 27일(화) 도쿄 부도캉(武道館)에서 아베 전 총리의 국장(國葬)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아베는 현 총리도 아니고, 이미 7월 13일 가족장으로 장례를 마쳤는데, 또 무슨 새삼스런 국장인가? 여기에는 일본 집권 세력인 자민당(自民党)의 무서운 전략이 숨겨져 있다. 현 일본 집권 세력들이 아베의 사망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인위적 띄우기는 한 마디로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도쿄 주오대학(中央大) 미야마 준이치(官山純一) 역사학 교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국장’이란 특정 인물을 기리는 데 있어 국민도 정부도 모두 납득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국가가 행하는 의례(儀禮)이다. 아베 전 총리는 그러한 대상은 결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 “그 사람의 업적을 좋게 생각하지 많은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에서 ‘그는 위대하다’라고 공언하는 데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아베 전 총리는 ‘국장’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 정권을 위해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죽음의 정치학’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미야마 교수는 아베 전 총리를 평하기를 “아베 씨는 정치가로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전 세계에 웃는 얼굴로 돈 뿌리고 다녔을 뿐이다.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경제정책)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일본 최고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연일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현 기시다 내각의 무리수는 아베가 꿈꾸던 군국주의 달성을 위한 민심 통합 전략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2014년 아베 총리가 내각 19명 중 15명을 규합하여 ‘닛뽕카이기(日本會議)라는 정치조직을 만든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정치 조직의 정체는 자국 우월주의적인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복고운동으로서 국수주의적이고 역사 수정주의적인 목표를 내세운, 그리고 서양 식민주의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시킨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을 ‘東亞公營圈’으로 미화) 일본을 찬양하며, 재군비를 통해 자유주의에 세뇌 당한 전후 세대들에게 군국주의적 애국심을 불어 넣고, 전쟁 전의 옛 패권 시대처럼 왕을 천황(天皇)으로 숭배한다는 것이다. ‘닛뽕카이기’ 지지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일본 점령이 민주주의를 가져 왔다고 인정하지 않으며, 점령 그 시기에 태어난 자유로운 평화 헌법이 일본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우파가 용기를 얻어 자유로운 언론을 공격하고, 저널리스트의 연구자를 위협하며, 나아가 재일한국인을 표적으로 하는 증오심 넘치는 ‘혐한’(嫌韓) 선동을 펼친다. 이들의 당면 목표는 참의원, 중의원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여 헌법 제9조(「전쟁의 포기」, 「전력의 불보유」, 「교전권의 부인」을 규정한 조항)를 삭제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 분쟁의 해결사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전범국가(戰犯國家) 일본만의 <특수국가>의 성격을 비자주적으로 강요 당했으나, 이제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주도했던 옛 ‘사무라이정신’(武士精神)을 되살려 ‘바쿠후타도(幕府打倒)와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목표로 한 ‘존왕운동’(尊王運動)을 확실히 계승하여 자위대(自衛隊)가 아닌 세계 경찰군으로 참여한다는 야욕을 드러낸 조직이 ‘닛뽕카이기’라는 것을 알 때 ‘아베의 정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아베가 총격을 받고 쓰러졌을 때, 저격범이 한국계일 것(?)이라는 언론의 즉각적인 반응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군국주의적’ 사상의 DNA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찾아진다. 일본의 역사 중 사무라이 전국시대(武士戰國時代)가 7백 년이 넘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고, 상징적인 왕은 쿄토(京都)에 둔채, 사무라이 정치의 중심이 되는 ‘바쿠후’(幕府)를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로 옮기고, 스스로 쇼군(將軍, 군총사령관)의 직을 갖고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8)를 열어 통치했다. 전국에 230여 개의 ‘번국’(番國, 지방을 다스리는 사무라이)을 두고, ‘다이묘’(大名, 지방 영주, 연봉 1만석 이상의 사무라이)로 하여금 분할 통치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265년 이어온 도쿠가와(徳川家)가 쇼군(將軍)의 막강한 ‘바쿠후’세습 통치는 1867년 ①왕정복고(王政復古) ②부국강병(富國强兵) ③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확보라는 3대 명분을 내걸고 혁명을 일으켰던 변방 세력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다. 이름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그 주체 세력은 당시 ‘조슈번’(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 현 山口県), 그리고 사츠마번(薩摩藩, 지금의 큐슈 九川, 가고시마 현 鹿児島県), 도사번(土佐藩, 지금의 시코쿠 四國, 고치 현 高知県) 이었다. 이 번들은 일본 열도의 서남쪽 변방이었고, ‘바쿠후’(幕府)에게는 거의 관심권 밖이었다. 그러나 이들 번들은 상호 연관을 갖고(Connecting)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큐슈와 서남 지방에 수시로 나타나는 미국 동인도양 함대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해군 함정과 선박들은 증기동력으로 운항하며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는 데 대하여,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고집하고 있는 바쿠후의 군사력은 사람이 노젓는 재래 수준으로서는 의기소침 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이 있는 ‘다이묘’(大名)는 번에 사숙(私塾, 대학 수준의 교육기관)을 운영하였는데, 그 중에 주목할 곳이 ‘조슈번’(長州藩)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이다. 왜냐 하면, 이 사숙이 오랜 일본 사무라이 역사의 물줄기를 근대화로 바꿔놓은 혁명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병학자요 사상가이며 교육자가 있었다. 그는 ‘메이저유신’을 착안하고 설계했으며, 그에 걸맞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유년 시절부터 바쿠후 체제 하의 영재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그는 지리적 영향으로 서양의 가공스러운 군사력과 문화충격을 접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로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는 몽상과 좌절을 체험하면서 사회변혁을 통한 독립국가 일본을 주창하면서 주군(主君)인 조슈 번주에게 변혁의 주체가 될 것을 건의하고 학문적 동지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였다. 5살에 숙부의 양자로 입양된 쇼인은 1년 후인 6살에 숙부가 죽자 숙부가 개설한 ‘하기’(萩)의 사숙,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의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병학과 학문을 통해 자기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바쿠후가 법으로 정해 놓은 타 영역 여행금지령을 어기고 큐슈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사숙에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지만, 결국 29살의 나이에 옥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