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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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은 1894년 6월 26일 켄터키 리치몬드에서 결혼하였다. 그의 나이 26세였고, 신부 샬롯은 27세로 1살 연상이었다. 로티 위더스푼(Charlotte Ingram Witherspoon)은 1867년 5월 13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토마스 드와이트 위더스푼, 어머니는 샬롯 버논 잉그램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그 선조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넘어온 정통 장로교 목회자 가정이었고, 미 건국과 함께 미국을 주도한 명문가에 속했다.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을 필라델피아에서 공표할 때 주도하여 서명했던 56인의 미 건국 아버지들 가운데 유일한 목사였으며, 뉴저지의 프린스턴대학 총장이었던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목사가 그 집안의 선대 어른이었다.
켄터키 촌놈이었던 유진 벨이 미 명문가의 사위가 된 데에는 장인의 역할이 컸으리라. 유진 벨이 켄터키 리치몬드에 있는 센트럴대학을 다니고 임시 신학과정을 밟을 때 교수가 바로 리치몬드제일장로교회 담임을 겸하고 있던 토마스 위더스푼 목사였다. 스승과 제자 관계가 남달라서 아마도 선생은 자기 딸인 로티를 소개하였을 것이고 자연스레 이 둘은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리라.
여성 선교사들의 출신 대학
한국을 찾아와 수고한 미 남성 선교사들이 다 고등교육을 이수하며 실력을 갖추었듯이 여성 선교사들도 대부분 대학을 나온 인재들이었다. 미 남부의 젊은 남자들이 다녔던 유명대학 못지않게 여자들 만의 유수한 대학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어거스타 여자신학교’와 ‘아그네스 스캇 대학’이다.
‘아그네스 스캇 대학(Agnes Scott College)’은 1889년 조지아주 디케이터에서 시작하였다. 아틀란타 바로 인근에 설립된 기독교여성 지도자 양성 교육기관으로 1990년대를 넘어와서야 겨우 남성 입학이 허락되었다. 현재도 1천명 미만의 소규모 고컬리티를 지향하는 사립대학이다. 우리 조선 호남에 온 출신 선교사로는 목포교회 5대 목사요 순천교회를 개척했던 프레스톤의 아내 애니 프레스톤(Annie Shannon Wiley Preston) 사모를 비롯하여 그들의 장녀이며 순천에서 교육 선교한 미리암 선교사와 차녀이며 다니엘 커밍(김아각)의 부인으로 목포에서 교육 사역한 애니 샤논 선교사까지 3모녀가 학교 동문이었다. 또한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간호 사역한 허우선 선교사, 라두리 선교사, 유진벨의 딸이며 린튼의 부인으로 전주와 대전, 목포에서 교육 선교한 인사례(Charlotte Bell Linton) 선교사 등이 있다.
미 남장로교에서 또 달리 세웠던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어거스타 여자신학교(Augusta Female Seminary)’는 버지니아 스턴톤에 있다. 1842년에 개교하였는데, 그 유명한 ‘어머니의 날’을 제정한 사람이 이 학교 동문인 마리아 자비스와 애너 자비스 모녀다. 딸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모든 어머니들의 날을 제정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머니가 죽자, 딸 애너 자비스가 이를 기억하여 기념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로 확산된 게 지금의 어머니날, 혹은 어버이날이다.
어거스타 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선교사로는 군산에서 사역한 7인의 선발대, 전킨의 아내 메리 전킨 선교사, 불의 아내 앨비 불 선교사, 그리고 유진 벨의 아내 로티 벨 선교사 외에도 여럿이 있다.
이 학교의 1회 졸업생 가운데 메리 줄리아 볼드윈이 있었고, 그녀는 20년쯤 지난 1863년 이 학교의 교장이 된다. 그때는 남북전쟁 시기로 모든 학교가 운영이 어려워 폐교하는 지경이었는데 그녀는 용기있게 학교를 살려내며 이끌었고 1895년 후배들은 그녀의 공로를 인정하여 학교 이름을 ‘메리 볼드윈 신학교’로 개명까지 하였다. 그리고 학교는 1923년 4년제로 재편하면서 ‘메리 볼드윈 대학(Mary Baldwin College)’으로 발전하였다.
흥미로운 건 이와 똑같은 이름의 학교가 예전에 한국 군산에도 있었다. 앨비 불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모교와 모교회를 방문하여 호남 군산에서의 사역을 보고하고 학교 발전을 위한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메리 볼드윈 학교 학생들은 헌금 1천 달러를 매월 송금하였으며, 버지니아 렉싱톤 장로교회의 여전도회원(메리 볼드윈 동문)들도 상당한 기부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군산의 남학교인 ‘영명학교’는 3층의 교사를 여학교는 2층의 새 교사를 지을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여 여학교는 ‘멜본딘기념학교’라 하였다.
멜볼딘여학교는 1937년 다른 기독교미션학교들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는데, 해방이 되고도 한참 후인 1965년 손재덕 장로에 의해 학교가 복교되었으며, 1980년 ‘군산영광여고’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89년 22세의 나이때 어거스타 여자신학교를 졸업한 로티는 1893년 11월 13일 미남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이때 유진 벨도 동시에 같이 신청하여 임명받았다. 유진 벨은 아직 목사안수도 신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아마 이무렵 그들은 함께 결혼하여 한 가족으로서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단하였을 터이고 이 과정에 장인의 권면과 지도가 컸으리라. 선교사로 임명 받은 후 1년 지나 1894년 결혼하였고, 또 1년 지나 1895년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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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를 위해 부른 유진 벨과 로티 부부,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난 첫 아들 헨리와 함께 |
조선으로의 부름심, 가난과 질병, 사망과 절망의 저주에 놓인 한국, 그리고 호남에 생명과 소망의 불씨를 놓으려 하나님의 열심은 강력하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자라게 하고 공부도 시키며 그들을 강권하고 훈련하여 서로 가정도 맺고 협력의 끈을 엮어 조선에 빛을 던지려 유진 벨과 로티도 사명자로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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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2-08-11 09: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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