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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그대의 헌법 정신은 안녕하십니까?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우리 조국의 7월에는 역사적인 두 날이 들어있다. 하나는 제헌절이다. 조선 왕족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추어 대한민국 헌법을 만천하에 공포한 날로서 올해가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정전협정일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 공산집단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을 중단하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로서 1953년 7월 27일, 올해가 69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자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공화국으로서 당당히 세계 앞에 주권 국가임을 밝힌 날이고, 후자는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국외자(局外者)의 입장에서 정전이 되었으며, 법적으로 한국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상태라는 슬픈 현실이다.


각설하고 나는 1987년 민주화로 탄생한 현행 헌법책을 펴고 자구 하나하나에 뜻을 새겨 마음에 담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前文)과 130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안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지향성, 그리고 구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전문은 국가 공동체의 역사와 지향성을 개괄(槪括)하고 있는 바, 그 의미가 너무 깊어서 여기에 싣는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전문에 이어 주문(主文)은 나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1조부터 9조까지 국민·영토 등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요소를 정의(定義)하고, 민주주의, 공화주의, 국제평화주의 등 대한민국이 추구할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헌법 제1조를 보라.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국가들, 특히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헌법에 스스로를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헌법학자들의 공통적 지적이다. 내가 방문했던 나라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상당수의 나라들이 입헌군주국이든 전제군주국이든 군주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았다. 사회주의 국가, 심지어 북한과 같은 절대독재국가임에도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입헌군주국도 인민공화국도 아닌 민주공화국이며, 이를 헌법에서 표방(標榜)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내 나라이다.


20세기 초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는 군주국가였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전제 군주국임을 분명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무너진 지 불과 9년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면서 출범하였다. 그리고 1948년 수립된 우리 대한민국 정부도 이를 이어받아 민주공화국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사실 군주정(君主政)의 오랜 역사의 무게를 감안할 때, 이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이 조문이 성립되기까지의 역사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0년 이전 대한제국 시기에 공화정을 거론했으면 어땠을까? 국가에 대한 대반역 행위로 3대가 멸족 당했으리라. 그래서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은 1904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전공한 조소앙(趙素昻, 1887-1958, 경기도 파주 생) 선생이 기초하였으며 ‘민주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볼 때에도 과감하고 선구적인 조문이었다고 한양대학교 역사학자 박찬승 교수는 기술하고 있다.


다시 제1조를 보자. ①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한 다음,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이 주인된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10조부터 39조까지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의 장이다. 제10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을 비롯하여 평등권, 적법 절차의 원칙, 거주 이전, 직업 선택, 주거 사생활, 통신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재산권, 재판 청구권, 교육권, 노동권, 환경권, 사람답게 살 권리 등 기본권과 국방, 납세의 의무, 그리고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가 차례차례 열거 된다. 이 부분이 헌법의 백미(白眉)다.


이 나이에 헌법을 심도 있게 살펴보면서 스스로 가슴 뭉클하게 매료되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만시지탄일까?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중심에 놓고 그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규정한 뒤, 그 권리가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상호 보장될 수 있도록 국가 공동체의 틀을 설계했다는 점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인간이기에 존중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고 다양한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의 실현을 보장 받는다. 그래서 거기서 오는 행복감은 충만하다. 뿐이랴.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주권자는 국민이고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 받는 자에 불과하다. 헌법은 국가의 통일정책 및 추진 의무(4조)와 여성의 근로 보호와 복지·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할 의무(32조, 34조), 그리고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을 위해 정책을 추진 할 의무(34조)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 헌법에 근거한 통일부와 여성가족부의 폐지를 주장 했고, 또 그럴 것이라는 발상은 어느 나변에 있는 것일까?


헌법은 노동자의 노동권과 단체 행동권, 인간답게 살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발생한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을 둘러싸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근로 조건 아래서 일할 권리’(32조)와 ‘노조를 결성하여 근로 조건의 향상을 꾀할 권리’(33조) 자체를 무시하고 평가절하 하는 의견들이 속출했었다. 헌법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할 존중과 권리들을 규정하고 있다(10조에서 39조). 사람을 합격자와 탈락자로 가르고, 권리를 누릴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의 소위 ‘능력주의’ 및 ‘공정’ 담론이 불평등한 현실을 압도한다.


우리 나라의 역대 공교육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전인교육이 아닌 ‘시험능력주의’ 학원식 교육이 역대 정부 정책이었으며, 더욱이 전 정부는 역대 그 어느 정부보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 무관심했었고, 교육관료들 또한 이와 같은 폐해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정권의 무정책에 편승하여 손 놓고 있었다. 그러면 새정부는 어떤가? 윤석열 대통령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괜찮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도덕적 사회적 문제투성인 인물을 부총리급 교육 수장으로 임명하면서 “그동안 야당과 언론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다”고 했다. 도대체 국가의 백년대계인 공교육을 설계하고 추진해야 할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認識)은 결과적으로 그 피해는 학생과 국민의 아픔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주창한 공정과 상식의 국정은 어디에 적용되는 것일까?


회의(懷疑)와 냉소(冷笑)로 기울어진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헌법의 높은 가치에 순응하고 균형 잡힌 효능감을 십분 누릴 수 있는 눈부신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할 때가 바로 이때다. 헌법과 법률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일사불란하게 길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유, 평등, 평화, 박애 정신을 극대화하여 인류 공영의 행복을 추구하는 물줄기가 헌법 정신이 아니던가! 이제라도 늦지 않다. 국정을 책임 맡은 통치자가 국가의 초석(礎石)이 되는 헌법이 지향하는 바, 국민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선진화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길 바란다. 지금 내가 마주할 많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응당 누려야 할 헌법적 기본권을 보장 받도록 넓은 세계관으로 국민의 봉사자로 섬겨 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로마서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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