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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속의 흑역사 - 이성재 목사




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성경은 우주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역사책이다. 개인과 가문과 민족의 밝은 면은 물론 어두운 수치와 모욕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기록했기에 더욱 권위가 있다. 이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후대들에게까지 민족의 정체성과 여호와 신앙을 준수하기 위함이다(신 6:20-25, 참조).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 중 하나가 오류(誤謬)와 오판(誤判)이 타 민족에 비해 최소화된 민족이라는 것이 역사가(歷史家)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은 치부(恥部)를 가리는 속성이 있어 개인, 가문, 국가할 것 없이 과거를 미화하거나 과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내가 몸소 경험한 조국의 해방 전후와 6.25 한국전쟁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분명 흑역사가 짙게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기고 합리화로 일관한 책이 바로 한국현대사이다. 이렇게 숨기고 미화했다고 해서 과거의 오류가 영구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숨기는 가해자와 이를 밝히려는 피해자 간에 이해 충돌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 민족이 깊이 앓고 있는 갈등과 혐오와 분열로 점철된 양극화의 아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갈등과 혐오와 분열로 얼룩진 혼란한 카오스(Chaos)의 강을 건너 반듯한 코스모스(Cosmos)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교과서적인 현대사의 행간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병원(病源)을 드러내 치유해야 바른 역사관이 설 것이며 미래를 가꾸어 나아갈 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여기에 몇 가지 사실(史實)을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가 운전 할 때 백미러를 보는 것은 뒤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이듯이, 이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현대사의 큰 획이 되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로 타임머신을 되돌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 독일과 팟쇼 이탈리아의 유럽 한 축(軸), 그리고 일본 제국의 태평양 한 축(軸) 진영이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의 전쟁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과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이 났다. 연합군의 전쟁 당사국 정상들인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 중국의 장재스(蔣介石) 총통 등은 승리를 전제로 한 전후 처리를 위해서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회담, 1945년 2월 우크라이나의 얄타 회담, 그리고 5개 월 후인 7월 독일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 회담 등을 열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이 처음 명시되었고, 나중 두 회담은 일본의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비롯하여, 일본과 식민지의 처리 방안, 일본으로부터의 소련, 중국의 영토 반환 문제, 특히 종전을 눈앞에 둔 한반도 해방 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조국에 대한민국의 오판(誤判)이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남북 대치 등 75년의 비극으로 점철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해 5월 독일은 패망했고, 태평양전쟁의 종식 1주일을 앞 둔 1945년 8월 8일, 미국은 그들이 주도하는 연합군 대열에 스탈린의 소련을 끌어들여 극동 아시아 지역 대일전쟁(對日戰爭)에 참전시킨 것이 한반도 분단의 결정적 단초(段初)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극동 아시아 지역 팽창 전략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쿠릴 열도와 사할린 섬의 반환과 부동항(不凍港) 확보 및 유라시아 패권(覇權)을 노리고 있던 스탈린의 야욕을 채워주는 호기가 된 것이다.


일본 제국이 포츠담 선언을 일언지하 거절하자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 실전 투하(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로 이어졌고 그달 15일 정오 일본 왕 히로히토(俗仁)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미국은 얄타, 포츠담 비밀 회담에서 소련에 대하여 만주(현재, 중국 동북 3성)와 한반도 38선 이북을 통치하던 일본 관동군 사령부 부대와 경찰 병력의 무장 해제는 물론, 이권까지 약속하자 스탈린은 쾌재를 부르며 8월 10일 함흥을 시작으로 8월 말까지 북한 전역을 손쉽게 장악하였다. 스탈린의 소련은 그 여세를 몰아 소련군 정보국 로마네스코사령부의 대위에 불과한 김성주(金成柱)를 임시 계급장 소령을 달게 하고 조선독립군의 위대한 김일성(金日成)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한 공산당 정권을 수립하게 하였다. 가짜 김일성으로 하여금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가 바로 그것이다. 전광석화 일사불란하였다. 김일성 일당의 공산당 정권의 정권 수립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불만을 가진 인민들은 가차 없이 숙청하거나 죽음의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이산의 아픔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국내외에 독립운동에 몸 바쳐 오던 공산당 인사들도 반대 세력으로 몰아 박헌영 등도 예외 없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당하였다.


그러면 남한은 어떠했나? 일본이 패전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태평양미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를 일본점령군 총사령관으로 명하고 9월 2일 도쿄만 요코하마 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정식으로 항복 문서를 받는 한편, 일본 전토와 남한의 점령군으로서 관할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경우 미군이 9월 7일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였고, 8일 본대(미 제24사단, 사단장 하지 중장)가 오키나와로부터 상륙함으로써 해방 24일 만에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끝까지 일본 총독부의 음모에 속아 넘어간 하지 중장은 독립투사나 우익 인사들을 배제시키고 친일파를 그대로 행정과 치안을 승계시켰다. 심지어 독립운동 인사들에게 대한민국 법통을 이을 ‘임시정부’ 삼부 요인 자격으로서의 귀국까지 거부하고 모두를 ‘개인 자격’으로 입국시키는 수모를 겪게 했을 뿐 아니라, 귀국 후에도 미군정으로부터 정치 참여의 기회가 차단되었다.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 선거를 실시, 국회 구성과 그 국회에서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안이 채택되었으나 미·소 협상 과정에서 그 계획은 무위로 끝났고,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서 국회를 구성하고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 그해 8월 15일 남한 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전술한 바와 같다. 한편, 1946년 미군정 아래서 육군의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이어 해군, 공군이 창설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해·공군으로 발전하였다.
남북한이 독립되었으므로 미·소 점령군은 1948년 6월부터 철수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북한 주둔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육·해·공군 무기와 장비 등을 그대로 놓고 병력만 빠져 나가는 한편, 훈련 요원이 남아서 철저한 군사 훈련은 물론 무기 및 장비의 사용 방법과 요령 등을 일일이 익히게 하였다. 그러나 주한 미군은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공언하면서 “개성에서 아침을 먹고, 평양에서 점심을, 그리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는다”는 호전성을 드러낸다 하여 미 정부 당국은 ‘북침’의 위험성을 염려한 나머지 군·경에게 M1 소총과 칼빈 소총, 고작 태평양전쟁 때 사용했던 장갑차 27대, 그리고 형식적으로 소량의 박격포와 곡사포 정도를 남기고 철군하면서 군사고문단 5백명을 남겼다. 차량의 기동률이 40%도 미치지 못하는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력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에 비해 북한군은 육군 공격의 주무기인 탱크 242대를 비롯, 해군 함정 110척, 공군 항공기 211대, 전투기 197대 등 막강한 군사력은 사실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간헐적으로 개성 송악산 등지에서 북한의 도발로 국지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군에 대한 북한군의 간보기였음에도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그 때마다 한국군의 승전보라고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이승만 국부 만들기에 취해 있던 정권이 북한의 계략에는 깜깜이었던 당시 군 정보의 무지를 누구에게 탓하랴. 설상가상으로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 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에치슨라인(Acheson Line)을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은 그 영역에서마저 제외되었다.


드디어 적화통일의 찬스가 바로 이 때라고 판단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에 힘입어 6.25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조용한 주일 새벽 지축을 흔드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 김일성 도당의 전 전선에 걸친 남침은 3일 만에 서울까지 집어삼켰다. “영용무쌍한 우리 국군은 북한 괴뢰도당을 물리치고 북진 중에 있습네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은 북한군이 27일 의정부를 지나 28일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전파를 타고 전 국민을 속였다. 27일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에 계셨는데 말이다. 유일한 한강교는 대통령의 피신 후 폭파시킴으로써 서울시민들의 발이 묶였고, 많은 애국지사와 지식인들이 납북되었다.


열강들의 오판이 가져온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아프가니스탄의 가니 대통령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착시일까? 국민과 운명을 함께 하는 대통령,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1919년 타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이후 1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지난날의 오류와 오판과 오만(傲慢)의 잔혹사를 뛰어넘는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 식민 지배와 분단, 냉전과 내전, 군사 독재라는 참혹한 역사의 질곡을 거치고도 우리는 반듯한 나라를 만들었다. 2020년 우리나라는 세계 178개 국 중 제10위의 경제 규모와 제6위의 군사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이제는 제발 국제적, 국내적 오류와 오판과 오만으로 발병했던 ‘헬조선’의 광기(狂氣)를 넘어서서 국력에 걸맞은 성숙한 나라, 세계가 주목하는 도덕적, 경제적 선진국 만들기에 우리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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