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명은 사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은 사명입니다. 또한 사명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죽으면 사명도 같이 죽습니다. 사명이 끝나면 생명도 끝이 납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마음에 품으시고 당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단지 이 땅위의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원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로 생명은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 할 것이요.” 사명에서의 사(使)자는 부릴 사, 심부름한다는 사(使)자입니다.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소사, 나라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대사, 특별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특사, 몰래 보낸 심부름꾼을 밀사, 하나님의 심부름꾼을 천사, 예수님의 심부름을 하는 제자는 도사가 아니고 사도라고 합니다. 사명에서 명(命)은 목숨 명, 목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명이란 사신이나 사절에게 주어진 명령, 맡겨진 임무, 맡은 일을 말하며, 사자(使者)란 윗사람의 명령이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심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을 사명감이라고 하고, 심부름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를 사명적 존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자식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희망일수는 있지만 부모님들의 뜻대로 되는 일도 아닌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생명과 함께 사명을 부여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원리에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풀벌레 한 마리, 심지어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그 고유의 사명을 부여해서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명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 산천초목, 풀 한 포기까지도 (물, 흙, 돌) 생명이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각각 사명을 주었습니다. 사명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명이 없다면 불에 태우거나 버려지게 됩니다.
준비된 지도자!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모세는 거듭된 실패로 크게 좌절했습니다. 자신은 입이 둔하다며 부정적인 말을 반복합니다. 동족이라고 여긴 히브리인에게 거부당한 슬픈 기억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론과 모세는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신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기 위해 레위 가문을 지키셨고,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가게 하셨음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예비된 자라는 자신감입니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죽습니다. 환자도 죽고, 치료하던 의사분도 죽습니다. 걸인도 죽지만, 재벌도 죽습니다. 성도들도 세상을 떠나지만 목회 지도자들도 반드시 별세합니다. 죽음은 지식, 권력, 돈으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누구나 생의 애착은 본능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초행길이라 그럴까요? 사실 현대인들에게는 생존이 기적이며 은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동안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 암과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분들도 우리와 똑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저런 일들을 보며 눈치를 채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 나도 죽을 수 있구나. 나도 죽는구나!”
그리스도인이란 살기 위하여 살거나 먹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하기 위해 먹고 잘 죽기 위하여 바르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잘 죽어야 잘 산 사람입니다. 잘 죽으려고 하면 잘 살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추하게 죽지 않기 위하여 아름답게 살아야만 합니다. 만일 당신의 남은 삶이 한 달 뿐이라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요? 그렇게도 예쁜 내 자식들, 그렇게도 아끼던 그 무엇들, 그렇게도 미워하던 그 누구, 그렇게도 원망하던 일들, 그렇게도 악착같던 지난날의 삶, 그렇게도 고마웠던 사람들, 다 남겨두고 뒤로하고 한 달 후에 훌쩍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간다면 우리의 오늘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미워할 것도, 원망할 일도, 용서 못할 사람도, 욕심 부릴 일도 없을 것이며, 온통 감사 덩어리일 것입니다. 모든 일에 다 감사하고,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얼마나 회개하고 거룩함으로 나아가야할까요? 하루하루가 아니 분초마다 얼마나 진지하고, 귀하고 아까울까요? 예배 한번이, 기도 한 시간이, 얼마나 애절하고 귀할까요? 남은 생이 한 달 남았을 때의 심정으로 오늘을 사는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뿌리 깊은 영성생활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라면 죽음에 초연하며, 죽음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세상과는 결별이지만 주님과는 신혼생활의 시작이며, 죽음은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 잠옷으로 갈아입듯이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하며, 죽음은 이 방에서 저 방으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종 바울은 빨리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바울의 소원은 속히 이 세상을 떠나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토록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그 말은 덕담입니다. 일찍 죽으라는 말은 욕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오래 오래 살라는 말처럼 섭섭한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쩌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을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의 평균 수명이 10-20년 연장되고 있지만 반면에 젊은 층들의 사망률이 배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야할지 모르는 우리의 삶이기에 오늘을 더 아름답게 더 열심히 살아야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분의 사역을 위해 준비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사명을 위해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