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목사 (본지주필, 기독교한국신문논설위원 군남반석교회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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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돈을 풀어서 쓰면 금방 다 써버리는 느낌인데 세월도 일월달 시작되는 듯하다 벌써 일년의 절반을 보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미 하나님 주신 것을 놔두고 감사를 잊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고 있을 때가 많다.
실존주의 신학자 폴틸리히는 현대세계의 특징을 불안과 불신과 고독과 무의미라고 했다.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꼬의 소설 중에는 코뿔소라는 작품이 있다. 내용 줄거리는 어느 평화스러운 마을에 갑자기 코뿔소 한 마리가 나타난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코뿔소로 변해 가는데 주인공 베랑제와 그의 애인 데이지만은 인간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모두가 코뿔소로 변했는데 자신들만이 사람이기에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여 괴로워하다가 데이지가 사라져버린다. 그때 홀로 남은 주인공 베랑제는 인류 최후의 인간으로서 절대 고독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이야기다.
작금의 정치지도자들의 막말 파문으로 인하여 묵과할 수 없는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지성도 사라지고 지식도 사라져버린 것인가? 우리의 젊은이들이 배울까 두려운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인간적인 존재로 타락하여 변했다 해도 예수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비인간화된 세상에 오셔서 새 생명과 길 되신 예수님만이 참 인간을 회복시켜 주신다.
이 세상이 때로는 요란해도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행복을 원하고 잡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집에 있는 행복을 놔두고 거리를 찾아 행복을 잡으려한다. 내안에 지금 행복 되신 예수께서 계셔도 길거리에서 행복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다음은 독일의 시인 칼부세의 시 ‘산 너무 저쪽’이다. 산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 아!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돌아왔네 / 산너머 저쪽 더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또 말을 하더라
우리가 어릴 적에 무지개가 아름다워서 잡으려고 쫓아가면 없어지고 또 쫓아가면 저 멀리 떠있는 무지개를 보았는데 어쩌면 행복이란 쫓아가면 없어지고 쫓아가면 더 멀리 있는 것은 아닐까?
유명한 미술가 반고흐(1853-1890)는 188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내고 붕대를 감고 담배파이프를 물고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후 2년도 못되어서 1890년 7월 29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말하기를 ‘사람은 자기가 결심한 만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결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 곁에 있다. 엄청난 기술이나 환경이나 큰일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쁘게 여기며 감사할 때 생겨난다. 즉 행복이란 외부의 환경적 요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샘솟듯 솟아난 것이 아닌가?
행복이란 누가 그저 가져다주지 않는다. 우연히 생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감나무 아래서 입 벌려도 감은 들어오지 않는다. 내 자신이 만든다. 귀가 잘린 고흐의 자화상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인들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패러다임(Paradigm)으로 체험을 프락시스(Praxis) 하는 가운데 예수님 체험을 통해 감사할 때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 행복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여 전하는 기쁨을 가져보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사명을 다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행복도 사명을 다하는 곳에 있다. 거리를 헤매며 행복을 찾지 말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뼛속까지 새기며 우리의 온 몸으로 감사해보자. 행복해보자. 그래서 예수 때문에 이미 와진 행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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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2-07-22 10:4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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